발레리 게르기예프
일반적으로 지휘봉은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카리스마를 상징한다. 100명 넘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지휘봉 움직임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천상의 화음을 빚어낸다. 그러나 어떤 지휘자들은 지휘봉을 과감히 버린다.
오는 27, 28일 런던 심포니를 이끌고 내한하는 러시아 출신 명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는 ‘맨손 지휘’ ‘이쑤시개 지휘’로 유명하다. 그는 음악적 표현을 섬세하고 자유롭게 하기 위해 주로 손가락으로 지휘한다. 개별 악기군에 좀 더 정확히 지시해야 할 경우엔 이쑤시개처럼 작은 지휘봉을 쓴다.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 유리 테미르카노프, 피에르 불레즈 등 거장들도 비슷한 이유로 맨손을 선호한다. 쿠르트 마주어는 1972년 교통사고로 새끼 손가락을 다친 뒤부터 지휘봉을 버리고 ‘맨손 지휘’의 대명사가 됐다. 미국 엘에이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평소 지휘봉을 쓰지만, 앙코르로 즐겨 고르는 번스타인의 <맘보>와 히나스테라의 <말람보> 등 남미 리듬 춤곡은 맨손으로 춤추며 지휘한다.
아예 손이나 팔조차 움직이지 않고 ‘머리’로 지휘하는 이도 있다. 지난 2007년 파리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내한한 크리스토프 에센바흐는 마지막 곡인 라벨의 <볼레로>를 연주할 때, 곡이 클라이맥스에 오를 때까지 지휘봉을 내려놓고 차렷 자세를 취한 채 고개를 까딱이며 지휘했다.
물론 대다수 지휘자들은 지휘봉을 쓴다. 악단 뒷편에 자리 잡은 타악기나 금관악기 연주자들에게까지 지휘가 잘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다. 특히 대편성 교향곡이나 리듬이 복잡한 현대 음악은 악기간 호흡을 맞추기가 까다로워 지휘봉으로 명확하게 지시할 필요가 있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지휘봉의 길이는 대개 12인치와 16인치다. 길면 무겁고, 손떨림 때문에 휘청거릴 수 있어 12인치가 널리 쓰인다. 하지만 지휘자의 키, 팔길이, 자세 등에 걸맞게 좀 더 짧거나 긴 지휘봉을 만들기도 한다. 정명훈 서울시교향악단(서울시향) 상임지휘자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에 있는 자택 정원의 올리브 나무 가지를 잘라 직접 지휘봉을 만든다. 나뭇가지의 자연스러운 형태를 살려가며 손수 깎은 그의 지휘봉은 소장 가치가 높아 종종 자선 경매에 나오기도 한다. 지휘봉에 각별한 애정을 갖거나 개인적 의미를 부여하는 지휘자들 가운데는 ‘반드시 특정 지휘봉을 써야 한다’거나 ‘리허설 도중 지휘봉이 부러지면 운이 나쁘다’는 등의 징크스를 가진 경우도 있다. 독일음악협회 지휘자포럼 소속으로 활동 중인 지휘자 지중배 씨는 “지휘자들은 흔히 지휘봉을 ‘내 팔’의 연장선이라고 말한다”며 “지휘자가 뭔가 불편하면 그게 고스란히 연주자들에게도 전달되므로 길이, 무게, 손잡이 느낌 등이 자신에게 적당한 지휘봉을 선택한다”고 했다.
연주자 입장에서는 맨손 지휘와 지휘봉을 쓰는 경우가 어떻게 다를까. 임가진 서울시향 제2바이올린 수석은 “오케스트라 편성이 큰 경우 지휘봉을 쓰면 눈에 잘 띄어 도움이 되지만, 그보다는 지휘를 얼마나 정확하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다”며 “한 지휘자와 오래 호흡을 맞추다 보면 상호간에 다양한 시그널(신호)이 생겨 무엇을 요구하는지 작은 표정이나 몸짓으로도 쉽게 알아챌 수 있다”고 말한다.
연주 도중 지휘봉이 ‘사건’을 일으키는 경우도 흔하다. 음악에 몰입해 격정적으로 지휘하다가 지휘봉이 휙 날아가거나 보면대(악보를 놓는 대)에 세게 부딪혀 부러지는 일이 다반사이다. 지난 2004년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교향악단을 이끌고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3번>을 연주하던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는, 지휘봉에 왼손이 찔려 피가 흐르는 바람에 그 곡이 끝나자마자 후반부 연주를 악장에게 맡기고 병원 응급실로 향해야 했다. 2010년 8월 정명훈은 서울시향의 말러 전곡 연주 시리즈 첫 무대에서 말러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다 지휘봉이 부러지자 맨 손으로 지휘를 마쳤다. 김소민 객원기자 sompar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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