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극 `철로’
의자 하나로 오가는 런던·대구
철도민영화 비극 걸터앉았네
의자 하나로 오가는 런던·대구
철도민영화 비극 걸터앉았네
사무실에서 쓰는 바퀴 달린 의자. 흔히 보는 이 일상 가구는 연극 <철로> 무대에서 수시로 다른 용도의 소품으로 탈바꿈한다.
대구에 사는 한 작가가 영국 철도 운영을 취재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 의자는 기내 좌석이다. ‘운행중 잠시 휴대폰을 꺼 달라’는, 비행기와 극장에서 공통적으로 듣는 안내가 흘러나온다. 뒤이어 의자는 탈선 사고로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런던 북부의 고속열차로 변신한다. 의자는 다시 인터뷰 자리로 바뀐다. 철도 사고로 ‘시체 6번’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마주한 어머니, 사고 배경을 캐다가 비용 절감을 위해 싸구려 재료를 쓰는 철도사업의 허점을 찾아낸 그가 인터뷰의 주인공이다.
영국 고속철·대구참사 그려
민영화 허점·유족 슬픔 조명 2000년 영국의 철도 탈선 사고를 다룬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의 원작에,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접목해 각색한 <철로>는 구도가 독특하다. 절제된 무대 위에서 철도 민영화의 허점에 대한 차가운 설명과 철도(지하철)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뜨거운 아픔을 함께 담아낸다. 영국 이야기에서는 산 자들의 호소보다 민영화에 대한 비판이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그러다 작가가 한국에 돌아온 날, 의자가 사고 당일 대구 지하철 안 의자로 바뀌면서 극은 사고의 끔찍함과 남겨진 사람들의 아픈 사연으로 초점을 바꾼다. 연극은 192명 사망, 151명 부상이라는 건조한 숫자로 사고가 정리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누군가의 목소리와 시간이 흘러도 메시지를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그 하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느끼게 된다. <철로>는 2008년 서울연극제 때 선보인 뒤 4년 만에 공연되는 작품이다. ‘민영화’라는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 사안과 그에 따른 변화가 촉발한 사회적 사건을 ‘개인’의 시선으로 옮겨 이야기를 풀면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인다. 극중에서 민영화를 이끈 주역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항공사, 은행, 철강회사 민영화를 차례로 진행했다는 글로벌 투자 은행가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영국 재무부 관료는 열차와 선로를 따로 떼어내 여러 회사에 영업권을 주고 경쟁을 부추기는 ‘레일트랙’을 기획한 건 합리적인 결정이었고, ‘예상과 달리 이용객이 늘어나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변명한다. 대구 지하철 사고 뒤 보상 및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예산은 오히려 삭감된다. 관료들은 유족들이 보상금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보기까지 한다. 피해자 유족들은 항변한다. “돈 받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철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철도망 전체에 안전한 ‘자동보호시스템’을 도입하라고 주장하는 영국 어머니와, 대구 지하철 사고로 부인을 잃고 대구시를 상대로 시위를 벌이는 남편의 대사다. 이렇게 연극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번 더, 담담히 응원을 보낸다. 번역 최정우, 연출 박정희. 배우 김은석, 방승구, 김정호 등 출연.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02)889-3561.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민영화 허점·유족 슬픔 조명 2000년 영국의 철도 탈선 사고를 다룬 영국 극작가 데이비드 헤어의 원작에, 2003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를 접목해 각색한 <철로>는 구도가 독특하다. 절제된 무대 위에서 철도 민영화의 허점에 대한 차가운 설명과 철도(지하철)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들의 뜨거운 아픔을 함께 담아낸다. 영국 이야기에서는 산 자들의 호소보다 민영화에 대한 비판이 더 비중 있게 다뤄진다. 그러다 작가가 한국에 돌아온 날, 의자가 사고 당일 대구 지하철 안 의자로 바뀌면서 극은 사고의 끔찍함과 남겨진 사람들의 아픈 사연으로 초점을 바꾼다. 연극은 192명 사망, 151명 부상이라는 건조한 숫자로 사고가 정리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드러낸다. ‘사랑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누군가의 목소리와 시간이 흘러도 메시지를 지우지 못하는 사람들 모습에서 그 하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관객은 느끼게 된다. <철로>는 2008년 서울연극제 때 선보인 뒤 4년 만에 공연되는 작품이다. ‘민영화’라는 어렵고 복잡해 보이는 정치적 사안과 그에 따른 변화가 촉발한 사회적 사건을 ‘개인’의 시선으로 옮겨 이야기를 풀면서 관객의 감정을 움직인다. 극중에서 민영화를 이끈 주역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항공사, 은행, 철강회사 민영화를 차례로 진행했다는 글로벌 투자 은행가는 여전히 자신만만한 표정이다. 영국 재무부 관료는 열차와 선로를 따로 떼어내 여러 회사에 영업권을 주고 경쟁을 부추기는 ‘레일트랙’을 기획한 건 합리적인 결정이었고, ‘예상과 달리 이용객이 늘어나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변명한다. 대구 지하철 사고 뒤 보상 및 사고 재발 방지 대책은 제대로 진척되지 않고 예산은 오히려 삭감된다. 관료들은 유족들이 보상금 때문에 물러서지 않는다고 보기까지 한다. 피해자 유족들은 항변한다. “돈 받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저는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요.” 철도 사고로 아들을 잃은 뒤 철도망 전체에 안전한 ‘자동보호시스템’을 도입하라고 주장하는 영국 어머니와, 대구 지하철 사고로 부인을 잃고 대구시를 상대로 시위를 벌이는 남편의 대사다. 이렇게 연극은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한번 더, 담담히 응원을 보낸다. 번역 최정우, 연출 박정희. 배우 김은석, 방승구, 김정호 등 출연. 26일까지 서울 동숭동 대학로 예술극장 소극장. (02)889-3561.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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