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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다른 시대·다른 풍경이 하나가 된 마술

등록 2012-02-23 20:59수정 2012-02-23 21:31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전은 현대 유럽 회화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20세기 네덜란드의 독특한 구상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코스 판쾰런의 <아잇제와 피사넬로>(2003),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전은 현대 유럽 회화의 영감의 원천이 되는 20세기 네덜란드의 독특한 구상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이다. 코스 판쾰런의 <아잇제와 피사넬로>(2003),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전
1차대전 직후 불안심리 반영
비현실을 사실적 묘사 특징
20세기 이후 작품 71점 선봬
두 소녀가 마주 보고 있다. 왼쪽은 오늘날 평범한 네덜란드 소녀이지만 오른쪽 소녀는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15세기 르네상스 사람이다. 오늘날의 소녀와 르네상스 시대 소녀의 이뤄질 수 없는 만남인 셈이다.

네덜란드 화가 코스 판쾰런(72)의 유화 그림 <아잇제와 피사넬로>(2003)는 르네상스 초상화의 선구자인 이탈리아 화가 피사넬로(1395~1455)가 주로 그렸던 옆모습 초상화 형식을 빌려왔다. 자신의 딸 아잇제와 피사넬로 시대의 소녀의 만남을 꾀한 작품이다. 두 인물의 초상 배경을 아무런 장식 없이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했던 투명한 푸른 색조로 처리한 것이 인상 깊다.

빔 슈마허의 <아디네 미스의 초상>(1933),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빔 슈마허의 <아디네 미스의 초상>(1933),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또다른 네덜란드 화가 빔 슈마허(1894~1986)가 친구의 부인을 그린 <아디네 미스의 초상>(1933)을 보자. 한 여인이 쿠션을 등에 대고 비스듬히 누워 휴식을 즐기고 있다. 그런데 등 뒤에는 벽이 있음에도 주변은 노출된 들판이다. 여인의 주위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고 나비가 날고 저 멀리로 산등성이가 보인다. 반나치적 태도를 공공연하게 표명했던 이 화가가 당시 유럽 사회의 유·무형 압박을 피해 몇년간 산속 마을에 은둔하면서 그린 작품이다. 뾰족한 턱 선과 눈매, 도드라진 광대뼈의 얼굴과, 전체적으로 분명한 색조 대신 회색조를 쓴 화면에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이 서려 있다.

이 그림들은 1920~30년대 네덜란드를 휩쓴 미술사조인 ‘마술적 사실주의’(magic realism)의 대표작들이다. 인물이나 사물, 풍경들을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색채를 씌우거나, 현실에서 공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뒤섞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 특징이다.

카럴 빌링크의 <르네상스 복장의 소녀>(1945),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카럴 빌링크의 <르네상스 복장의 소녀>(1945), 도판 사진 서울대미술관 제공
서울대미술관이 20세기 유럽 화단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나 국내에서는 낯선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 미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전시회를 꾸몄다.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 전통에서 현대까지’란 제목의 이 전시에서는 카럴 빌링크(1900~1983)와 빔 슈마허(1894~1986), 딕 켓(1902~1940), 라울 힝커스(1893~1973) 등 1세대 작가부터 코스 판쾰런, 베르나르딘 스테른헤임(64), 필립 아케르만(55) 등 2세대 작가, 아르나우트 판알바다(44), 이리스 판동언(37), 하니 더베이르(33) 등 신세대 작가까지 43명의 그림과 조각 71점을 선보인다. 지난해 한국과 네덜란드 수교 50돌을 기념해 네덜란드 아이엔지(ING)은행의 소장품 중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들을 골라 한자리에 모았다.

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20년대를 전후해 시작된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전쟁과 불황에 내몰렸던 당시 유럽인의 불안한 심리를 담고 있다. 1920~30년대는 독일 신즉물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위세를 떨친 시기였다. 특히 전후의 전위적인 다다이즘 예술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가 무의식의 흐름을 표현하면서 현실 공간에서 서로 양립하기 불가능한 소재들을 작품에서 결합시켰다면,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강한 전통을 갖고 있는 네덜란드에서는 사실에 기반하면서도 좀더 몽환적인 분위기의 화풍이 유행했다.

실제로 전시회를 둘러보면 그림마다 완벽한 구도와 지극히 정교한 기법, 치밀한 붓질을 바탕으로 한 현실과 비현실의 기묘한 만남을 발견할 수 있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럴 빌링크의 <르네상스 복장의 소녀>(1945)에는 반짝이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8살짜리 꼬마 소녀가 르네상스 시대 드레스를 입고 잘 꾸며진 정원 앞에 서 있다. 언뜻 보기에는 현실에 충실한 사실주의 기법의 작품 같지만 그림의 배경인 이탈리아 르네상스식 정원은 작가가 제멋대로 그려넣은 것이다. 소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8살 꼬마 같지 않고 마치 세상을 다 알아버린 선지자의 표정을 짓고 있어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 미술관의 오진이 선임학예사는 “마술적 사실주의는 ‘불안한 현실과 순수에의 동경’으로 요약할 수 있다”며 “20세기의 불안과 소외 등을 표현한 구상화의 전통은 오늘날에도 유럽 회화의 영감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초상, 정물, 풍경 부문으로 나뉘어 20세기 네덜란드의 마술적 사실주의 초기부터 최근까지 80여년의 변화를 한눈에 보여준다. 4월12일까지. (02)880-9504.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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