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런던심포니 내한공연
러시아 거장 발레리 게르기예프를 음악감독으로 맞이한 런던 심포니의 음색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영락없는 러시아 악단 같았다. 바이올린이 좌우 양 날개로 포진하고 왼쪽에 첼로, 오른쪽에 비올라가 자리잡은 배치도 러시아 악단의 전통을 연상시켰다.
지난 27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내한 첫날 연주. 러시아의 데니스 마추예프가 협연한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은 섬광 같은 약동감으로 시작됐다. 그는 양손을 교차하며 체중을 실어 건반을 찍어 눌렀다. 묘기에 가까운 연주는 묵직한 바위들이 비탈길에서 굴러가듯 거침없었다. 목관·금관군의 강력한 협주에, 강철 타건이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그치지 않는 커튼콜에 마추예프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앙코르 곡은 그리고리 긴즈부르크가 편곡한 그리그 <페르 귄트> 가운데 ‘산속 마왕의 궁전에서’. 망치 같은 타건에 피아노가 부서질까 염려될 정도였다. 청중은 한계를 넘어서는 경이로운 연주를 체험했다.
곧바로 한국의 12살 소녀가 드레스를 입고 게르기예프와 함께 등장했다. 장형준 서울대 교수의 소개로 거장에게 인정받은 임주희양의 깜짝 무대였다. 라벨의 <피아노 협주곡 1번> 1악장. 마추예프가 뿜었던 불길이 가시지 않은 피아노 위에서 임주희는 주눅 들지 않고 침착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중간 휴식 뒤 펼쳐진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1악장은 결이 살아 있는 금관으로 다가왔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 굵은 현의 합주도 인상적이었다. 피아노와 무겁고 음울한 금관, 거칠게 울부짖는 목관이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2악장은 정신이 번쩍 났다. 악단 특유의 풍성한 금관과 강렬한 목관이 돋보였다. 3악장은 음악의 흐름을 끊김 없이 지속하는 게르기예프의 면모를 만났다. 4악장은 날카롭게 벼린 검에 비친 햇빛처럼 강렬했다.
이어진 28일 공연.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협연한 사라 장은 연한 녹색 드레스를 입고 나왔다. 지난해 상트페테르부르크 필과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할 때와 마찬가지로 가끔 뒤로 몸을 젖히고, 발로 차는 동작이 나왔다. 뚜렷하고 힘찬 보잉(활질)이었지만 왠지 오케스트라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했다. 사라 장의 바이올린은 속도 제어기를 단 자동차 같았다. 런던 심포니가 질주하려 해도 전위에 선 그의 바이올린이 추월을 허락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의 바이올린은 4악장 끝나갈 무렵에야 제 궤도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곡은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게르기예프는 1악장에서 템포를 유동적으로 가져갔다. 한 군데 정착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2악장은 1악장보다 변화가 적고 일정한 흐름을 유지했다. 3악장은 ‘절제 후의 질주’라 할 만했다. 큰북과 심벌즈가 깜짝 놀랄 음량을 선보였고, 피날레로 향할수록 점차 뚜렷해졌다. 쉼없이 넘어온 4악장. 후반부에 침잠해 들어가던 현이 은은한 광채를 사방으로 내뿜었다. 마지막을 불태우듯 고조되기도 하다가 울부짖듯 엉기며 쓰러지는 관과 현을 게르기예프는 펄쩍펄쩍 뛰며 독려했다. 꾸역꾸역 어렵게 생의 이별이 준비되고, 땅이 꺼지듯 가라앉았다. 만 60살을 앞둔 거장의 매력을 많은 이들에게 확실히 아로새긴 연주회였다. 공연 중 벨소리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청중들 박수 매너는 그 어느 공연보다 좋았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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