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목! 이 작품] 에바 헤세 ‘무제’
검은 액자 속에 기괴한 이미지의 인물 두 명이 나란히 서 있다. 이목구비는 거의 생략하다시피 했고, 몸 윤곽도 단순한 선으로 나타내고 칼로 거칠게 긁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황토 빛 면사포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듯한 오른쪽 인물의 왼손에 보랏빛 부케가 들려 있어 결혼식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단지 추정일 뿐이다. 신체와 유령의 이미지가 녹아든 듯한 그림 속에서 작가의 의도를 읽기는 힘들다. 작가도 ‘무제’란 제목을 달았을 뿐 아무 설명도 남기지 않았다.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 신관 1층에 내걸린 천재 여성작가 에바 헤세(1936~1970)의 유화 <무제>(1960, 125.7×125.7㎝)는 불가사의한 작품이다. 그는 금속, 나무, 돌 대신 라텍스와 플라스틱, 섬유유리 등 파격적인 소재를 이용한 ‘부드러운 조각’으로 20세기 현대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지만 화가로 출발한 초창기 작품세계는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이 그림은 이 화랑이 지난달 28일 시작한 ‘에바 헤세’전에 나온 작가의 생전 공개되지 않았던 회화 20점 가운데 하나다. 34살에 요절한 작가의 초기 예술인생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미국 예일대에서 20세기 기하추상 분야의 대가인 요제프 알베르스(1888~1976)에게 그림을 배운 뒤 1960년 뉴욕으로 건너가 첫 스튜디오에서 그린 연작이다. 헤세는 1960년 한해 동안 미친 듯이 그림에 매달려 무려 48점을 그렸다. 알베르스에게 가르침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추상표현주의 화가 빌럼 더 코닝(1904~1997)과 실존주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무제>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작가의 자화상과도 같다. 헤세는 독일 함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세살 때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부모의 이혼, 어머니의 우울증과 뒤이은 자살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러한 경험은 고스란히 작업에 투영됐다. 유령 같은 모호한 형태, 거친 표면 처리와 칼이나 붓으로 긁은 듯한 ‘스크래치’, 물감을 흘러내리게 하는 ‘드리핑’, 채도가 낮은 색채 등이 불안한 내면을 짐작하게 한다. 헤세 자신도 일기에서 “오직 페인팅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고, 그렇기에 나 역시 페인팅을 끝까지 해내야만 한다. 이것은 내 존재 자체와 완벽하게 상호 의존하는 것이다(1960년 12월27일)”라고 썼다.
신관 2층에서는 헤세가 1960년대 중반 조각으로 돌아서면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로 만든 조각 소품 15점도 소개되고 있다. 4월7일까지. (02)735-8449.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그림 사진 국제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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