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8일 오후 서울 용산역 대합실에서 ‘페스티벌 봄’의 이색 퍼포먼스 작품인 <가끔은 널 볼 수 있는 것 같아> 리허설이 열렸다. 대합실의 연인들을 관찰해 묘사한 소설가 김연수씨의 글이 이 연인들 옆에 설치된 액정 스크린에 떠 있다.
국제다원예술축제 참가한 즉흥소설 ‘가끔은 널…’
아르헨 연출가 펜소티 작품
용산역서 작가 등 4팀 작업
행인 사연 지어 화면에 올려
“현실·허구의 상호영향 주목”
아르헨 연출가 펜소티 작품
용산역서 작가 등 4팀 작업
행인 사연 지어 화면에 올려
“현실·허구의 상호영향 주목”
기차역 대합실 한쪽. 검은 스웨터, 검은 바지 차림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손에 들린 사진을 쳐다보는 그 옆으로 사각형의 검은 액정 스크린 장치가 서 있다. 화면에는 남자의 자태와 행동을 기록한 흰색 자막이 죽 올라왔다. ‘남자는 검은 바지를 입고 발을 꼬고 있다. 안에는 검은 스웨터를 입었다. 사진 속에는 지난가을의 추억이 들어 있다.’
감시카메라가 지켜보는 걸까? 그렇다. 그 남자의 자태를 묘사한 내용에, ‘지난가을의 추억’이란 가상의 사연까지 추가한 이 ‘감시카메라’는 작가다. 남자로부터 10여m 떨어진 기둥 옆에 자리잡고 남자를 지켜본 인상을 노트북에 쳐서 액정 스크린으로 전송한 이는 소설가 김연수씨. 김씨는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을 지정한 뒤 묘사하고 (그 사람에 대한) 가짜 바이오그래피(전기)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했다. “즉흥적으로 만드는 이야기, 퍼포먼스예요. 기승전결이 있는 게 아니니까 소설을 쓰던 것과는 너무 다른데, 현장성에서 오는 감동 같은 게 있어요. 이야기 대상이 되면 감동이 더 커지겠죠.”
29일부터 다음달 2일까지 평일 낮 4~6시, 주말 낮 12~2시 사이 서울 용산역 안 장항선 대합실에서는 ‘인간 감시카메라’들이 쓰는 2시간짜리 ‘즉흥 소설’이 중계된다. 시인 강정, 소설가 김연수, <한겨레21> 기자 하어영, 싱어송라이터 소규모아카시아밴드가 작가가 되어 역사 곳곳에 자리잡고 사람들을 관찰한다. 겉모습과 행동을 노트북에 기록하는 동시에 그들의 숨은 사연을 상상해 새 이야기를 지어낸다. 글은 각자의 노트북과 연결된 4개의 액정 스크린 장치에 즉시 띄워진다.
무심하게 역을 오가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는 새 흑백 스크린 속 소설의 주인공이 된다. 국제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의 참가작 <가끔은 널 볼 수 있는 것 같아>에서 펼쳐지는 일이다. <가끔은…>은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부터 날아 온 공연 연출가 마리아노 펜소티(39)의 작품. 2010년 독일 베를린에서 초연한 뒤 벨기에 브뤼셀,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세계 10여개 나라에서 공연했다. 비서구 지역 공연은 이번이 처음이다.
펜소티와 4팀의 ‘작가’는 공연 전날인 지난 28일 용산역에 모여 리허설을 했다. 현장에서 만난 펜소티는 “현실에 자막 달기”라는 말로 <가끔은…>을 소개했다. “공공장소에는 이미지를 포착하는 감시카메라가 있지만 감시의 목적이나 누가 그걸 통제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모르죠. 그 점이 흥미로웠고, ‘영상 대신 문자로 감시를 기록해보면 어떨까’란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4명의 참가 작가들은 ‘문학적인 감시카메라’가 되는 겁니다. 특정 장소에서 모르는 사람을 보고 기록하고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해서 쓰는 게 기본 콘셉트죠.”
그는 “현실이 허구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 거꾸로 허구는 현실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 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펜소티는 ‘공간에 대한 재인식’이란 말도 덧붙였다. “익숙하다고 여기던 장소를, 허구가 가미된 ‘자막’을 통해 낯설게 보면서 공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될 수도 있는 거죠.”
리허설 동안, 펜소티는 통역의 도움을 받아 4개 액정 스크린에 떠오르는 소설 내용을 살펴보면서, 참여 작가들에게 “좀더 짧은 문장으로, 빠른 속도로 쓰라”고 즉석에서 주문하기도 했다. 작가들은 다수의 행인들 가운데 재빨리 대상을 선택해 묘사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참여 작가들의 순발력과 감성은 연출가의 밑그림을 완성하는 색과 질감이 된다. 김연수, 소규모아카시아밴드는 지난해 성용희 페스티벌 봄 사무국장의 친동생인 가수 ‘짙은’의 소개로, 하어영·강정씨는 주변의 추천으로 차례로 참여작가에 합류했다. 같은 공연이지만, 나라와 작가마다 분위기가 다르다고 한다. 리허설이 끝난 뒤 펜소티는 “작가들 이야기가 재밌었다. 한국 작가들은 대상을 표현할 때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 것 같다. 반면 유럽, 특히 독일 작가들은 ‘저 멍청한 얼굴의 남자’라는 식의 문장을 쓰는 등 매우 짓궂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리허설이 진행되는 동안 역 안 사람들의 반응도 변했다. 처음엔 역 안 대형 텔레비전 뉴스 등에 집중했지만 새 이야기가 등장하는 작은 액정 화면의 존재를 알아차린 뒤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글을 읽어 내려가기도 했다. 시인과 소설가와 기자와 싱어송라이터가 쓰는 즉흥소설이 궁금하다면? 나도 한번, 이 소설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면? 용산역에 가면 된다.
글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사진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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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을 기획한 아르헨티나 공연예술가 마리아노 펜소티(맨 오른쪽)가 용산역 대합실에서 참여작가들과 함께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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