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기’전이 열리고 있는 호림박물관 신사분관 2층 전시장 일부. 대지를 상징하는 흰 모래 바닥 위에 다양한 모양새의 기대들을 늘어놓아 현대 설치작품 같은 분위기를 냈다. 아래 사진은 전시의 주요 명품 중 하나인 7세기 통일신라 토기합. 몸체와 뚜껑 전면에 일정한 간격으로 선무늬를 돌려 엄숙하면서도 단아한 미감을 빚어냈다.
곡선미·추상적 문양 빼어나
테마설명 없는 소장품 나열
관객 궁금증 못풀어 아쉬움 우리 옛 그릇의 대명사를 백자, 청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예단일 뿐이다. 아르마니, 라시드의 명품 디자인 못지않은 옛 토기 명품들의 고즈넉한 멋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가 이우환의 점과 선을 무색케 하는 미니멀한 삐침 선 하나, 물방울처럼 앙증맞은 화염 모양의 뚫은무늬(투창)…. 그들의 자태가 옛적 장인들의 아득한 마음을 향한 원초적 그리움으로 우리를 휘몰아간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호림박물관 분관에서 펼쳐지고 있는 개관 30주년 특별전 ‘토기’(9월28일까지)는 토기를 주제로 한 국내 전시들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기획전이라고 할 만하다. 토기는 발굴 현장에서 무수히 출토되지만, 대개 고고학자들이 유적 시대를 가늠하는 편년 자료로만 쓰인 뒤 수장고로 직행하기 일쑤다. 11년 전 이 박물관 기획전 ‘한국토기의 아름다움’에 이어 이 전시에 다시 나온 토기들은 디자인 감각이나 추상 무늬의 매력이 예사롭지 않은 감상용 명품들이다. 차분한 블랙톤 공간에서 빛을 발하는 각양각색의 상형, 이형 토기들과 그릇받침, 뿔잔 등의 삼국시대를 전후한 최상급 토기 200여점이 눈을 사로잡는다. 1000도 이하에서 굽는 토기는 불과 나무, 흙이 날것으로 만나 빚은 정신이다. 가마의 등장으로 1000도 이상에서 굽게 되면서 도기와 자기로 바뀌어간 토기 변천사는 곧 문명 발달사였다. 영국 시인 키츠는 고대 그리스 항아리가 ‘숲속의 역사가’로서 “아름다움은 진리”임을 일러준다고 읊었다. 전시 출품작들 또한 아름다움의 원초적 진실을 엿보는 체험을 재촉한다. 2~4층 전시장의 백미는 가야 계통의 토기들이다. 투박한 직선 위주의 윤곽선을 그리는 신라 토기의 획일적 이미지와 달리 가야 토기들은 세련된 곡선과 다기한 상징을 함축한 추상 무늬가 일품이다. 4층 전시장 들머리 상형 토기들은 배, 수레, 짚신, 오리 등 다양한 일상기물과 동물을 그릇과 결합시킨 마술적 변형이다. 자연과 일상을 결합시켰던 장인들의 숨결을 느껴볼 수 있다. 물고기 입 모양으로 뱃전이 벌어진 배 모양 토기나 톱니 모양 장식대 위에 솟대처럼 새를 올린 장식항아리, 원과 요철의 독특한 기하학적 모양으로 받침대를 세운 토기그릇 등은 중국, 일본과 구별되는 우리 고대 조형미의 특질이다. 전위적이기까지 한 가야풍 토기의 파격성과 달리, 신라 토기들은 질박함과 단순한 용기의 모양새로 다가온다. 토우 붙은 항아리의 뚫린 구멍 밖으로 삐져나온 사람 얼굴상의 훈훈한 풍모는 잊지 못할 잔상으로 남는다. 특히 3층 전시장 중간에 메들리처럼 이어지는 고급 토기 명품들의 무늬 잔치는 인상적이다. 대형 목긴 항아리의 기하추상적인 문양과 종 모양, 고사리 모양 손잡이 달린 항아리, 그리고 통일신라시대 불교 신앙과 결합된 뼈단지의 국화꽃무늬 등이 물 흐르듯 이어진다. 감상 길에는 흥미로운 수수께끼도 따라다닌다. 기원전 정교한 청동기를 만든 선인들은 왜 이 시기 무늬없는 토기만 만들었을까. 머그컵과 다를 바 없는 삼국시대 컵 토기가 왜 고려, 조선시대엔 명맥이 딱 끊어질까? 전시는 이런 수수께끼와 의문에 친절하게 답해주지 않는다. 토기를 국내 도자문화의 당당한 주인공으로 재조명한다는 취지를 내걸었지만, 기획자는 2층 전시장에서 토기 받침 기대를 활용한 설치작품적인 전시를 마련한 것 외에는 넘치는 명품들의 테마에 걸맞은 이야기를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도록 뒤쪽에 실린 토기 계통, 문양 분류 등에 대한 고고학자의 논문을 빼면, 전시장에서 고대 토기의 미학적 의미와 변천·제작 과정, 문양의 상징성 등에 대해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대목이 없다는 점이 특히 그렇다. ‘토기’전은 소장품을 단순히 칸을 갈라 나열하는 관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호림박물관은 간송미술관, 삼성미술관 리움과 더불어 3대 사립컬렉션이지만, 소장품의 수준만큼 전시의 기획력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다. 관객의 궁금증을 긁어주는 배려가 아쉽다. 구슬은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것처럼. 입장료 8000원, 일 휴관. (02)541-3523.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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