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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제왕의 학문’ 꿈꾸던 장영실, 왜 실종됐나

등록 2012-04-29 22:12

이윤택 연출가가 11년 만에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궁리>의 한 장면. 이 연극은 천민에게 허락되지 않은 ‘하늘’에 대한 탐구, 곧 천문학을 하려다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되살린다. 국립극단 제공
이윤택 연출가가 11년 만에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연극 <궁리>의 한 장면. 이 연극은 천민에게 허락되지 않은 ‘하늘’에 대한 탐구, 곧 천문학을 하려다 역사에서 사라진 장영실을 되살린다. 국립극단 제공
이윤택 연출가 신작 ‘궁리’
천문 공부하던 천민 과학자
역사에서 사라진 과정 추리
실록 뒤져 극적 사건들 캐내
“‘슈퍼울트라 을’의 인생. 가진 것 없는 노동자인 나 자신과 장영실이 참 많이 닮아서 엉엉 울었다.”

지난 24일 연극 <궁리> 첫 공연을 보고 나온 한 관객의 감상평이다. ‘문화게릴라’ 이윤택(60·사진) 연출가가 오랜만에 내놓은 신작 <궁리>는 조선 초 과학자 장영실이 역사에서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과정을 추측한다. 장영실은 천민에게 허락되지 않은, 하늘(천문학)을 바라보고 탐구하려다 계급의 벽에 막혀 좌절하고 마는 인물로 그려진다. 이윤택 연출가는 “역사에서 사라진 민중을 주체적인 위치에 두고 접근하려 했다”고 말했다. 공연 시간 140분이 지루하지 않은, 밀도 있는 연출에 메시지가 자연스레 녹아 있다.

이윤택(60) 연출가
이윤택(60) 연출가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장영실의 마지막 기록이 <궁리>의 출발점이다. 세종 24년인 1442년 3월16일, 임금의 수레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수레를 만든 장영실은 벌로 곤장 80대를 맞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서 기록에서 사라진다. 연극 또한 이 사고에서 시작해 그가 처벌을 받으면서 끝난다. 단순한 줄거리 틀 속에 등장인물들의 내적·외적 갈등이 꼼꼼하게 표현된다. 왕권과 신권, 자주파와 친명파의 갈등 등 양반 관료들의 대립이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 이야기의 중심축은 그 가운데 희생되는 ‘인간 장영실’이다.

관노비에 지방(동래) 출신이고 고려 말 원나라 이주민의 자손인 장영실은 당시 계층 지도에서 철저히 소외된 ‘아웃사이더’다. ‘제왕의 학문’인 천문 역법을 연구하려 하지만 양반 관료들에겐 눈엣가시다. 그를 아끼던 세종 역시 나중엔 “더는 하늘을 보지 말라”며 수레를 만드는 단순 기술직을 맡긴다. 장영실은 “과학자인 내가 왜 수레나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를 억울해하고, 결국 수레는 그를 파멸시키는 직접적 발단이 된다.

장영실과 세종의 관계도 연출가의 재해석으로 새롭게 표현된다. 이 연출가는 <궁리>의 장영실을 “(세종의) 스토커”라고 표현했다. 장영실은 가장 가까이에서 왕을 수발하는 내시 역할을 자처하기도 하고, 극 내내 왕의 환영을 꿈꾼다. “그 역시 완벽한 인간이 아니고 주체성 없는, 그냥 천민이기에 주인에게 집착하고 주인이 시키는 것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극 말미에서 이런 태도는 바뀐다. 왕권을 확립하고 조선의 주체성을 강조하려는 세종과, 명나라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신하들의 대립은 극적 재미를 더해준다.

무대는 해시계를 콘셉트로 삼았다. 2층짜리 세트와 무대를 둥글게 감싼 반원형 나무다리 등으로 공간을 깊고 높게 사용한다. 200석 규모의 소극장이지만 400석 이상의 중극장 같은 느낌을 준다. 특히 160㎝ 높이에서 수레와 사람들이 떨어져 내리는 첫 장면과, 무대와 객석 사이에 ‘천상열차지도’가 펼쳐지는 마지막 장면의 잔상은 오래 남는다.

이씨는 그간 연극 연출, 뮤지컬 창작을 꾸준히 해 왔지만 직접 연극의 작·연출을 동시에 맡은 것은 <시골선비, 조남명> 이후 11년 만이다. <궁리>는 <시골선비, 조남명> <문제적 인간, 연산> 등 실존 인물을 집중 탐구했던 전작들의 연장선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일성록> 등 관련 사서들을 뒤져 인물과 굵직한 사건을 가져왔고, 대본을 12번 수정하는 동안 사서에 빠진 장영실의 내면, 행적에 대한 부분은 상상력으로 메꿨다. 이씨는 “런던에서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보고 장발장과 같은 ‘장’씨인 장영실이 이상하게 연상되더라”며 “<레 미제라블>의 분위기를 자주 떠올렸다”고 했다. 다음달 13일까지 서울 서계동 국립극장 백성희장민호극장. (02)3279-2233.

박보미 기자 bom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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