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연주회 여는 첼리스트 조영창
추모연주회 여는 첼리스트 조영창
“스승 돼주겠다” 먼저 손내민 뒤
8년간 개인교수·평생의 지지자
10년만의 한국독주회서 되새겨 1984년 여름, 독일 바이에른 주의 작은 도시 안스바흐. 스물여섯의 첼리스트 조영창씨는 약속 장소인 여인숙에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과연 반년 전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 정확히 약속 시간이 되기 30분 전,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오른쪽 사진)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곳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가 된 조영창(54·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악대학 교수·왼쪽), 둘만의 첫 번째 특별 교습이 이뤄졌다. 이들의 인연은 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참가해 4위에 입상했던 조씨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주쳤고, 중국인이냐는 물음에 “아뇨, 한국인입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2년쯤 뒤 조씨는 국내 한 신문사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던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동남아시아 순회 공연의 협연자로 조씨를 발탁하려고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일은 또 있었다. 성공적으로 순회 공연을 마친 뒤 로스트로포비치가 먼저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향후 2~3년간의 연주 일정표를 조씨에게 건네며 “시간이 남을 때마다 특별히 개인 지도를 할 테니 비행기든 기차든 타고 그리로 오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알고 보니 로스트로포비치는 콩쿠르 당시부터 조씨의 음악성을 눈여겨보고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독일 에센에 머물고 있는 조씨는 17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스승의 연주 일정과 동선에 따라 레슨 장소는 매번 바뀌었고, 잠시 들른 허허벌판의 숙소에서 이뤄진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1년에 5~6번 만나서 3~4시간씩 개인 지도를 받는 일이 거의 8년쯤 계속됐죠. 7~8시간 기차를 타고 가서 만나는 것쯤은 흔했어요. 스승님은 말씀을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어요. 연주를 듣고 나면 제가 했던 해석과 다른 관점의 질문을 던져 놓고 다음에 만날 때까지 스스로 답을 찾게 하셨죠.”
가끔은 사제지간이 아닌 친구처럼 술잔을 나누며 인생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했다.
“사람들 앞에서는 늘상 웃는 얼굴이셨지만, 제 앞에서 소련에 두고 온 가족 이야기를 하실 때면 종종 눈물을 흘리셨어요.”
두 사람의 관계는 음악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각별했다. 조영창이 87년 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악대학 교수직에 최연소로 임용되고 세계 음악계에서 남성 첼리스트의 주축으로 성장하는 동안 로스트로포비치는 변함없는 지지를 보냈다. 94년 고작 36살이던 그를 세계 최고 권위의 로스트로포비치 첼로 콩쿠르 심사위원으로 위촉한 것도 로스트로포비치였다.
그랬기에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 조씨의 그리움은 클 수밖에 없다. 올해 스승의 서거 5주기를 맞아, 스승이 말년을 바친 ‘크론베르크 첼로 페스티벌’의 음악감독이 추모 연주를 제의하자 조씨는 기꺼이 응했다. 그는 스승의 서거일인 지난 4월27일 독일 크론베르크 페스티벌 홀, 로스트로포비치 동상 앞에서 바흐 무반주 첼로 조곡 중 한 곡을 연주했다. 그리고 연주회장 안으로 자리를 옮겨 그리그의 <첼로 소나타>와 피아졸라의 <그랑탱고>를 연주했다. <그랑탱고>는 피아졸라가 로스트로포비치에게 헌정한 곡이다.
조씨는 다음달 7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다시 한번 스승을 기리며 추모 독주회를 연다. 독일의 추모 음악회에서 연주한 곡들과 더불어, 로스트로포비치가 가장 존경했던 작곡가 베토벤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 로스트로포비치와 조씨가 함께 공부했던 프로코피예프의 <첼로 소나타>를 들려줄 예정이다.
그는 “한국에서 10년 만에 하는 독주회여서 흥분된다”며 “연주곡 중 그리그 소나타는 로스트로포비치 선생님이 처음 내한했을 때 연주했던 곡이라 의미가 남다르다”고 말했다.
김소민 객원기자 somparis@naver.com 사진 영앤잎섬 제공
<한겨레 인기기사>
■ “2007년 여름 청와대 갔더니, 노짱이 흐느껴 울더라고요”
■ 물건 다 만들어놨는데 “발주 취소’…‘갑’ 삼성전자의 횡포
■ 간음 혐의 고영욱, 초췌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 통닭의 쾌재 “내 다시 전성기가 돌아올 줄 알았지”
■ ‘유니콘’ 이라 불리는 미스터리 야생 소
8년간 개인교수·평생의 지지자
10년만의 한국독주회서 되새겨 1984년 여름, 독일 바이에른 주의 작은 도시 안스바흐. 스물여섯의 첼리스트 조영창씨는 약속 장소인 여인숙에 두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과연 반년 전의 약속을 기억이나 하고 계실까?’ 정확히 약속 시간이 되기 30분 전,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오른쪽 사진)가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그곳에서 로스트로포비치와 오늘날 한국을 대표하는 첼리스트가 된 조영창(54·독일 에센 폴크방 국립음악대학 교수·왼쪽), 둘만의 첫 번째 특별 교습이 이뤄졌다. 이들의 인연은 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 참가해 4위에 입상했던 조씨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로스트로포비치와 마주쳤고, 중국인이냐는 물음에 “아뇨, 한국인입니다”라고 짧게 대답했다. 2년쯤 뒤 조씨는 국내 한 신문사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상임지휘자를 맡고 있던 워싱턴 내셔널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동남아시아 순회 공연의 협연자로 조씨를 발탁하려고 연락처를 수소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믿기 힘든 일은 또 있었다. 성공적으로 순회 공연을 마친 뒤 로스트로포비치가 먼저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이었다. 그는 향후 2~3년간의 연주 일정표를 조씨에게 건네며 “시간이 남을 때마다 특별히 개인 지도를 할 테니 비행기든 기차든 타고 그리로 오라”고 말했다. 이어 “내가 이런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는 말도 덧붙여졌다. 알고 보니 로스트로포비치는 콩쿠르 당시부터 조씨의 음악성을 눈여겨보고 후원자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 “2007년 여름 청와대 갔더니, 노짱이 흐느껴 울더라고요”
■ 물건 다 만들어놨는데 “발주 취소’…‘갑’ 삼성전자의 횡포
■ 간음 혐의 고영욱, 초췌한 얼굴로 “죄송합니다”
■ 통닭의 쾌재 “내 다시 전성기가 돌아올 줄 알았지”
■ ‘유니콘’ 이라 불리는 미스터리 야생 소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