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그을린 사랑>에서 주인공 나왈(가운데)이 자신을 강간한 고문 기술자를 고발하는 장면. 명동예술극장 제공
연극 ‘그을린 사랑’
팽팽한 긴장감에 관객 몰입
3시간 공연 뒤 조용한 침묵
팽팽한 긴장감에 관객 몰입
3시간 공연 뒤 조용한 침묵
무대 위에 늙은 레바논 여자 나왈의 독백이 나직하게 울려 퍼졌다.
“잔~, 시몽~, 왜 진즉 얘기해 주지 않았느냐고? 어떤 진실은 스스로 찾을 때만 그 모습을 드러낸단다. 비석에 내 이름을 새기고 내 무덤가에 비석을 세워주렴.”
객석 곳곳에서 울음이 새어나왔다. 지난 6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3시간의 공연은 애잔한 몽골 전통음악과 함께 막이 내렸으나 조용한 침묵이 이어졌다.
지난 5일부터 이 극장 무대에 오른 연극 <그을린 사랑>은 우리에게 인간 존재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쟁과 인간의 잔혹함에 새삼 놀라게 하고, 그것을 치유하는 사랑의 위대함을 깨닫게 한다.
레바논 태생의 캐나다 작가 와즈디 무아우아드의 원작 연극 <그을린 사랑>은 레바논 내전에 내던져진 이슬람 여성 나왈의 흔적과 그의 쌍둥이 자식 시몽과 잔의 출생의 비밀을 추적하는 여행기이다.
이 연극은 지난해 드니 빌뇌브 감독의 동명의 영화로 이미 알려졌다. 영화가 주는 시각적인 효과에 익숙한 관객들에게는 연극이 심심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동현 연출가는 원작이 지닌 시적인 언어의 강렬함과 탄탄한 서사구조의 힘을 굳게 믿었다.
연극에서는 특별한 무대장치나 장면 전환 없이 하나의 통합된 장소에서 모든 사건과 이야기가 풀어진다. 대신 무대 좌우와 앞뒤 공간을 조명과 샤막(보조막)으로 분할해 서로 다른 시공간을 효과적으로 재현해낸 무대 감각이 돋보인다. 또한 나왈의 여정과 시몽과 잔의 여정을 교묘하게 겹쳐서 현장감과 긴장감을 살려낸 솜씨도 빼어났다.
철골 구조가 드러난 거대한 콘크리트 기둥들로 이뤄진 무대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됐다. 기둥들은 주인공 나왈의 고향 산이 되기도 하고, 레바논 전쟁터의 폐허가 되기도 하면서 공간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극의 시작과 함께 나오는 중동지역의 옛 악기 ‘두둑’의 이국적인 멜로디를 비롯해 피아노와 30인조 오케스트라로 들려주는 음악도 극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젊은 작곡가 정재일씨의 솜씨다.
연극은 상당 부분이 배우의 독백으로 전개된다. 그만큼 배우의 역량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60대 늙은 나왈과 나지라·압데사마나의 1인3역을 소화한 여배우 이연규씨의 연기 내공이 두드러졌다. 특히 그는 극의 2막 후반 법정 장면부터 30여분간 인상 깊은 연기를 쏟아내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극 진행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크파르 라야트 감옥에서 자신을 고문하고 강간했던 ‘고문 기술자 니하드’를 고발하는 증오어린 증언, 14살 미혼모 시절 ‘잃어버린 아들 니하드’에게 들려주는 애정어린 속삭임은 동일한 배우라는 사실을 의심할 만큼 대사의 색깔과 연기의 밀도가 달랐다. 7월1일까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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