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주 오페라 페스티벌 ‘라 보엠’
가난한 남녀 슬픈 사랑 이야기
그리골로·물라, 미성의 하모니
정명훈 지휘에 8천 관객 환호
8월말 서울로 장소 옮겨 공연
가난한 남녀 슬픈 사랑 이야기
그리골로·물라, 미성의 하모니
정명훈 지휘에 8천 관객 환호
8월말 서울로 장소 옮겨 공연
푸른 밤 하늘이 열리고 별은 밝게 빛났다. 2000년 전 로마시대에 세워진 너비 103m, 높이 30m의 거대한 고대 극장에 오페라 아리아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대의 조그만 손이 왜 이다지도 차가운가요! 내가 따뜻하게 녹여 줄게요.” 가난한 시인 로돌프가 이웃에 사는 아름다운 여공 미미를 처음 만나 부르는 유명한 아리아 ‘그대의 찬 손’이다. 테너 비토리오 그리골로(35)의 미성이 끝나자마자 8천명을 헤아리는 객석에서 박수소리와 환호가 터져나왔다. 그러자 소프라노 인바 뮬라 차코(49)가 ‘내 이름은 미미’라는 아름다운 아리아를 부르며, 수를 놓으며 살아가는 미미의 처지를 소개한다. 더 큰 환호와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10일 밤 9시45분(한국시각 11일 새벽 4시45분) 프랑스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작은 시골마을 오랑주.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옥타비우스) 시절 식민지 오랑주에 건설된 야외 원형경기장에서 푸치니의 대표적인 오페라 <라 보엠>(연출 나딘 뒤포)이 무대에 올랐다. 1869년부터 시작되어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제인 코레지에 도랑주(오랑주 오페라 페스티벌)의 올해 주요 레퍼토리. 1830년대 파리 뒷골목 다락방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네 보헤미안 청년 예술가들의 우정과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특히 남녀 주인공인 시인 로돌프와 병약한 여공 미미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으나 가난 때문에 죽음의 이별을 한다는 애잔한 사연은 ‘그대의 찬 손’을 비롯한 주옥 같은 아리아에 담겨 해를 거듭할수록 아낌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프랑스 작곡가 드뷔시는 “자신을 단단히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이 오페라의 불길이 살짝 닿기만 해도 넋을 빼앗기게 된다”고 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도 “나는 이 작품을 처음 보는 순간 내 입술 위에 내 잃어버린 순수성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극장을 나왔다”고 극찬했다.
이날 공연은 정명훈 지휘자가 8천여명 관객들의 박수를 받으며 1981년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오랑주 원형극장에 등장해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니의 포디엄(지휘자석)에 서면서 시작되었다. 반원형 극장 전면을 장식한 길이 103m, 높이 37m의 벽면 아래 마련된 무대는 장식을 최소한 생략한 미니멀한 디자인으로 꾸며졌다. 넓이 103m, 깊이 22m의 드넓은 무대 위에 지붕과 벽이 없이 문과 가구로만 설정된 예술가들의 ‘다락방’, 미미의 작은 방, 파리의 학생거리인 ‘라틴구’, 오를레앙으로부터 파리로 들어오는 길인 ‘엔페의 관문’ 등 오페라의 주요 배경이 펼쳐졌다. 그 위를 주·조역을 비롯한 130여명의 인물들이 저마다 맡은 배역을 입체적으로 소화해내며 공연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또한 3막에서 37m 높이에서 영상을 쏘아 겨울철 눈길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무대 디자인이 눈길을 끌었다. 공연이 끝나자 정명훈씨는 “하늘이 열려서 기분이 좋다. 세종문화회관보다 소리가 좋다. 야외 공연을 좋아하지 않는데 이 공연은 특별하다”고 말했다. 파리 근교의 베종 라 로멘에서 온 저널리스트 플로랑스 (62)는 “오랑주는 자주 오는데 오늘 무대 연출과 오케스트라 연주가 특히 뛰어났다. 무대 위에 그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의상이나 무대연출, 음악이 잘 들어맞았다. 감동적인 무대, 아름다운 무대였다”고 평가했다.
무엇보다 남녀 주인공 로돌프와 미미역을 맡은 테너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소프라노 인바 뮬라의 열연이 돋보였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아레조 출신 테너 그리골로는 23살에 라 스칼라 극장 역사상 최연소 테너 데뷔답게 서정적인 미성의 리릭코, 부드럽지만 넓은 공연장 곳곳을 잘 전달하는 강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그는 13살 때 루치아노 파바로티와 함께 <토스카>에 목동역을 맡아 파바로티가 그를 ‘작은 파바로티’라고 언론에 소개하기도 했다. 또 알바니아 출신의 소프라노 인바 뮬라는 고음에서도 부드럽고 깨끗한 목소리로 세계적인 명성을 확인시켰다. 그는 1997년 뤽 베송의 영화 <제5 원소>에서 파라다이스 행성의 푸른 외계인이 불렀던 신비한 아리아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두 사람이 “열쇠를 찾고도 못 찾은 척하셨지요? 내 손이 차다면서”라는 2중창을 부르고 미미가 숨지면서 막을 내린 뒤에도 커튼콜까지 11분 동안 관객들이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환호를 보냈다.
이탈리아 베로나 아레나, 마체라타 스페리테리오 아레나와 함께 야외오페라페스티벌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코레지에 도랑주는 해마다 7~8월 <아이다>, <라 트라비아타>, <라 보엠>, <돈 카를로> 등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가 공연되고 있다. 또한 소프라노 바버라 핸드릭스,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 로베르토 알라냐, 바리톤 레오 누치 등 세계적인 오페라 성악가들이 무대에 섰다. 한국은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이 여러 차례 음악감독과 지휘를 맡았으며, 바리톤 고성현씨가 2006년 베르디 <아이다>의 아모나스로 역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며 여러 차례 초청받기도 했다.
한편 올해 코레지에 도랑주의 오페라 <라 보엠>은 제작총감독 레몽 뒤포와 연출가 나딘 뒤포의 제작 그대로 오는 8월28일과 30일, 9월1~2일 서울 신촌 연세대 노천극장에서 정명훈씨가 이끄는 서울시향의 연주로 국내 첫선을 보인다. 로돌포 역에는 ‘작은 파바로티’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뉴욕 메트로폴리탄, 베로나 아레나 등에서 활약한 테너 마르첼 조르다니가 맡는다. 특히 미미 역에는 세계 최고 소프라노로 손꼽히는 안젤라 게오르규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피오렌차 체돌린스가 전격 캐스팅되었다.
오랑주(프랑스)/글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코레지 도랑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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