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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창고 안 두 남자 정체성 잃은 현대인 슬픔 풍자

등록 2012-09-13 20:33

극작가 이강백(65·서울예대 교수)씨의 희곡 <북어 대가리>
극작가 이강백(65·서울예대 교수)씨의 희곡 <북어 대가리>
이강백 희곡 ‘북어 대가리’ 연극
수십년째 어두운 창고에서 살며 창고지기를 해온 두 남자가 있다. ‘자앙’은 창고 밖의 삶은 생각해보지 못한 채 매일 수많은 상자들을 일련번호대로 들이고 내는 일에 삶의 보람을 느낀다. ‘기임’은 반복되는 창고생활이 지겨워 요령을 피우고 대충대충 일하며 늘 불평 불만을 쏟아낸다. 자앙은 그런 기임을 다독거리며 위태위태한 일상을 지켜낸다.

“이 창고를 빠져나가면 또 뭐가 있을 것 같아? 저 하늘의 해와 달, 별들이 빛나는 우주는 거대한 창고이고, 우리의 이 창고는 그 창고 속에 들어 있는 수많은 창고 중에 아주 작은 창고거든. 만약 우리가 이 창고 속에서 행복할 수 없다면, 다른 창고에 들어가본들 행복할 수는 없어.”

어느날 창고에 상자들을 운반해주는 트럭운전수의 딸 ‘미스 다링’이 끼어들면서 두 사람의 생활을 지탱해오던 리듬이 깨어진다.

극작가 이강백(65·서울예대 교수)씨의 희곡 <북어 대가리>(사진)가 지난 6일부터 서울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무대에 올랐다. 1993년 김광림씨의 연출과 인기배우 전무송·최종원씨의 연기로 대학로 성좌소극장에서 초연되어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대상과 연출상, 작품상을 휩쓴 작품이다. 2004년 홍대창무포스트소극장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았던 구태환(40·극단 수 대표)씨가 8년 만에 다시 연출을 맡았다.

연극은 같은 생활환경에서 자랐지만 인생관이 다른 두 인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렸다. 고집스런 ‘성실주의’와 현실적인 ‘적당주의’ 사이의 대립을 ‘창고’라는 공간을 매개로 삼아 대비시켰다. 구태환 연출은 소극장 무대를 실제로 반듯반듯한 상자들로 가득 채워 극중 공간인 창고를 현대사회의 단면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연극은 언뜻 자앙의 ‘성실주의’를 더 조명하는 듯하지만, 기임을 떠나보내고 창고에 홀로 남은 자앙의 푸념에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슬픔이 아프게 배어난다. 자앙의 모습은 마치 기임이 속풀이로 몸뚱이는 국을 끓여 먹고 대가리만 남기고 간 북어와 닮았다.

“그래, 나도 너처럼 머리만 남았군. 네 눈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그토록 오랜 나날 나는 이 어둡고 조그만 창고 속에서 행복했다. 그런데 이 창고 속에서의 성실함이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연극은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두 남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여정을 담은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정성을 다해 상자들을 쌓는 자앙의 모습에서 끝없이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고행과도 겹친다. 상반된 가치관을 긴장감 있게 보여준 박완규(자앙)씨와 김은석(기임)씨의 관록 있는 연기가 빛난다. 23일까지. (02)889-3561~2.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코르코르디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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