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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농부·간호사가 배우로…‘태백산맥’ 벌교 무대서 마당극

등록 2013-03-10 20:07수정 2013-03-11 13:22

현 부자 역을 맡은 대학원생 전수평씨가 돌쇠어멈 역을 맡은 이혜숙(자동차중개상)씨를 몽둥이로 내려치자 돌쇠어멈의 딸 이쁜이 역을 맡은 황은아(회사원)씨가 말리고 있다. 뒤쪽은 마름 역의 벌교 딸기 농사꾼 김용빈씨.
현 부자 역을 맡은 대학원생 전수평씨가 돌쇠어멈 역을 맡은 이혜숙(자동차중개상)씨를 몽둥이로 내려치자 돌쇠어멈의 딸 이쁜이 역을 맡은 황은아(회사원)씨가 말리고 있다. 뒤쪽은 마름 역의 벌교 딸기 농사꾼 김용빈씨.
평범한 사람들 자발적 참여
소설 주요장면 상황극 각색
둘째주 토요일에 현장 공연
문학기행 관광객들과 얼~쑤
“난 말이여. 소작료를 7할을 거둬들인다 말이여.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열 가마니 나오면 일곱 가마니를 나에게 내면 되는 것이여. 소작료가 아주 싸지. 대신 알아야 할 것이 있어. 그것이 뭐냐 하면 니들이 쓰는 비료값하고 물세는 니들이 내야 하는 거야. 니들이 농사짓는 것이니까 당연한 거야. 알아듣겄지?”

현 부자 역할을 맡은 배우가 소작 조건을 밝히자 객석에서 “우우~” 하는 야유가 터져나온다. 그에 아랑곳 않고 현 부자가 사설을 이어 간다.

“비싸다고 생각하는 놈들이 있을 것 같아 말하는 것인데, 옛날 이 땅 주인이던 일본인 나카지마는 열 가마니 중에 아홉 가마니를 가져갔어. 긍게 느그들이 몇 가마니가 이득이여?”

어린 관객들을 중심으로 객석에서 곧바로 답이 나온다. “두 가마니!”

현 부자가 흡족한 듯 웃음을 피워 올리며 화답한다. “그라제~!”

9일 오후 전남 보성군 벌교읍 ‘태백산맥 문학관’ 옆 현 부자네 집 마당.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상황극으로 각색한 공연이 한창이다. 춥고 길었던 겨울이 지나고 집 앞 뜰에는 동백은 물론 매화와 산수유꽃도 얼굴을 내민 토요일을 맞아 문학기행에 나선 독자 30여 명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한껏 빠져들어 있다. 이들은 현 부자와 그 하수인인 마름의 악행에 혀를 차며 개탄하다가는 그들의 횡포를 온몸으로 감당해 내야 하는 소작인들의 안타까운 처지에 함께 눈물을 글썽이며 공감을 표한다. 이즈음 텔레비전 개그 프로그램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유행어 “나쁜 사람~!”을 지주와 마름의 등을 향해 던지기도 한다.

<태백산맥>의 주요 장면을 상황극으로 각색해 마당극 형식으로 올리는 이들은 전문 배우들이 아니다. 벌교에서 농사를 짓는 이들, 그리고 순천에서 회사에 다니거나 간호사로 일하거나 대학원에 다니는 보통 사람들이 배우처럼 분장을 하고 의상을 갖춰 입고 연기에 나섰다. 관의 지원이나 출연료를 받기는커녕 밥값과 교통비도 스스로 부담해 가며 헌신적으로 연기에 임하고 있다. 이들은 9일 공연을 시작으로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태백산맥>의 주요 무대에서 상황극을 올릴 예정이다.

현 부자 집 마당 장면에 앞서서는 일본인 나카지마(中島)가 주도해서 쌓았다는 중도방죽에서 방죽 축조에 동원되었던 방 노인과 당시 인부들에게 밥을 해 주었던 함바집 아낙 이꽃순이 문화해설사와 함께 중도방죽의 축조 경위와 의미에 관해 대화를 주고받았다. 문화해설사 김옥자씨와 함께 출연한 두 남녀는 벌교에서 딸기 농사를 짓는 전정주씨와 이순임씨 부부. 중도방죽과 현 부자네 마당 장면에 이어서는 소화의 집과 소화다리 및 홍교 해설, 그리고 야학교회와 본정통 남초등학교, 김범우 집에서의 상황극과 해설이 이어졌다. 특히 유동적인 전황에 따라 주민들이 서로를 고발하고 학살하는 남초등학교 운동장의 ‘손가락총’ 장면에서는 이 아마추어 배우들이 스스로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주제가 <손가락총>도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와 극의 효과를 높였다.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의 운동장에서 펼쳐진 상황극이 인상적이었던지 옆에서 공놀이를 하고 있던 아이들이 다음 상황극 장소인 김범우의 집까지 따라붙어 일행은 애초의 30여명에서 40여명으로 늘었다.

“저희 공연은 구비문학과 마당극의 성격을 지향합니다. 고정된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대사와 행동을 통해 <태백산맥>이 현재의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를 되새기고자 합니다. 대사와 상황 역시 극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공동창작에 가깝습니다.”

현 부자 역을 맡아 열연했으며 각색을 주도한 전수평(순천대 대학원 국문과)씨의 말에 이어 그의 순천대 스승이었던 국문학자 한만수 교수(현 동국대 국문과)의 평이 따른다.

“<태백산맥> 상황극의 가장 큰 장점은 벌교와 순천 주민들의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각자 생업이 있는 이들이 <태백산맥>이라는 문학작품의 역사적 배경과 현재적 의미를 대중의 눈높이에 맞추어 몸으로 연행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상황극이야말로 ‘살아있는 <태백산맥>’이라 할 만합니다.”

<태백산맥> 상황극을 보고 싶은 이들은 인터넷 포털 다음의 카페 ‘소설 태백산맥으로의 여행’에 접속해서 신청하면 된다. 다음 공연은 4월13일, <태백산맥> 문학관 진입로의 왕벚나무에 벚꽃이 한창일 무렵이다.

벌교/글·사진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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