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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유목민’의 노래엔 경계가 없다

등록 2013-03-12 20:14수정 2013-03-12 21:04

정란
정란
첫 솔로앨범 ‘노마디즘’ 낸 정란

재즈 음악인 사마마와 뉴욕 작업
동양과 서양, 낯섦과 익숙함 공존
장르 넘나들며 폭넓은 음악 담아
노랫말은 시처럼 상징·압축 가득
“나는 나…어디에도 얽매임 없어”

정란은 고등학생 때만 해도 자신이 예술가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지 않아 방과 후 미술실로 불려간 그가 10여분 만에 그린 그림을 보고 선생님이 놀라며 “너 미술 해보는 게 어떻겠니?”라고 물었을 때도 “저는 그냥 공부할래요”라고 했다.

하지만 수능 시험을 마치고 담임 선생님이 그를 서울 삼청동의 한 라이브 카페에 데려간 뒤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그가 유난히 잘 따랐던 선생님은 카페 사장에게 귀띔해 그에게 노래를 불러보도록 했다. 정란은 미국 여성 가수 캐롤 킹의 노래를 불렀다. 카페 사장이 말했다. “내일부터 여기 나와서 노래해요.”

대학 영어학과에 진학했지만, 학교 수업은 뒷전으로 하고 전국 재즈 클럽을 돌며 노래했다. 기획사에서 가수 데뷔도 준비했지만, 복잡한 사정으로 무산됐다. 어느 재즈 클럽에서 만난 아코디언 연주자 정태호가 물었다. “혹시 우리 밴드에서 노래해볼래요?” 정란은 그렇게 재즈 탱고 그룹 ‘라 벤타나’의 객원 보컬이 됐다. 라 벤타나는 2008년과 2010년 2장의 앨범을 냈고, 2집 <노스탤지어 앤드 더 델리케이트 우먼>은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크로스오버 음반상을 받았다.

‘이젠 내 소리를 내보고 싶어’정란은 밴드를 나왔다. 그동안 틈틈이 써온 자작곡을 들고 자신보다 더 넓은 시야를 가진 프로듀서를 찾았다. 홍지현 프로듀서가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음악원에서 공부하다 알게 된 재즈 음악인 루벤 사마마를 추천했다. 정란의 데모 음원을 들어본 사마마는 대번에 “오케이! 이메일로 작업을 진행하자”고 했다.

‘음악 작업은 눈을 마주보고 해야 한다’고 여긴 정란은 짐을 싸들고 사마마가 있는 미국 뉴욕으로 날아갔다. 허름한 아파트 하나 빌리고는 날마다 버스를 타고 사마마의 집으로 출근했다. 정란이 머릿속에서 그린 이미지를 선율로 표현하면, 사마마가 여기에 살을 붙이고 다듬었다. 그렇게 완성한 결과물은 재즈도 아니고 가요도 아닌, 그야말로 “대안음악(얼터너티브 팝)”으로 가득한 정란의 첫 솔로 앨범 <노마디즘>이 됐다.

지난달 첫선을 보인 이 앨범은 어느 한 장르로는 결코 가둘 수 없을 만큼 폭넓은 음악을 담았다. 처음엔 신비로운 분위기로 시작하다가 뒤에서 비명에 가까운 고음으로 이어지는 첫 곡 ‘관람’부터 범상치 않다. ‘몽유’, ‘수중고백’의 느릿하고 몽환적인 흐름에 몸을 내맡기고 나면, 두렵기도 하지만 빠져들 수밖에 없는 사랑을 노래한 ‘사자를 두려워하는 그대에게’를 만난다.

낯섦과 익숙함의 상반된 느낌이 공존하는 ‘나의 용사’, 그 어떤 이별 노래보다도 처절하고 아픈 ‘실명’,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공의 넋을 앗아가는 바다의 요정을 노래한 ‘세이렌’에 매혹되고 나면, 정란이 세이렌인지 세이렌이 정란인지 혼란스러워질 법도 하다.

밝고 따뜻한 곡들도 있다. 사마마와 듀엣으로 노래한 ‘유 앤드 미’와 ‘서프’는 한없이 감미롭고, ‘커피 오어 티’는 경쾌하고 발랄하다. 첼로 뜯는 소리가 마치 거문고 소리 같아 동양 음악인지 서양 음악인지 경계를 흐릿하게 하는 ‘천국에서’를 지나면, 풀벌레 소리로 시작했다가 점층적으로 소리를 쌓아가더니 급작스럽고 불길하게 끝을 맺는 ‘이프’가 앨범의 문을 닫는다.

여기가 동양인지 서양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알 수 없는 느낌. 앨범 제목을 왜 유목민의 삶과 사유를 뜻하는 <노마디즘>으로 정했는지 알 것 같다. “내 몸은 실제로 여기에 있지만, 나의 사고와 의식은 그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다”는 정란의 말은 음악으로 온전히 구현된다.

노랫말은 강렬한 상징과 압축의 묘미를 머금은 시와 같다. 자신의 실제 경험과 상상을 담아낸 것이라고 한다. 사진을 직접 찍거나 찍히기를 좋아하는 정란은 앨범 디자인에도 참여했다. 앨범 구석 어디 하나 그 자신이 아닌 것이 없다.

누구는 정란을 두고 아이슬란드 여가수 비요르크(뷔욕)를 떠올리고, 누구는 프랑스 팝의 아이콘 제인 버킨을 떠올린다. 그러나 정란은 “대단한 가수들과의 비교가 고맙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나”라고 잘라 말한다. 우리는 ‘한국의 ○○○’가 아닌, 그 자체로 소중한 ‘정란’을 얻었다. 한국 대중음악계의 축복이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사진 포니캐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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