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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무대선 요정, 현실선 속물

등록 2005-08-17 18:25수정 2005-08-17 18:26

노승림의무대X파일 - ‘포인트’ 첫선 발레리나 탈리오니
외모상 모든 점이 완벽해 보이는 발레리나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다름아닌 발. 몇년 전 발레리나 강수진의 토슈즈를 벗은 맨발이 공개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 험악하고 기형적인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편으로 그의 맨발은 무대 위에서 완벽한 춤을 추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발레리나의 혹독한 연습과 애환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왜 발레리나들의 발은 못생길 수밖에 없을까. 이는 발끝을 완전히 세워서 춤을 추는 동작, 이른바 고전발레의 기본 테크닉이자 상징이나 다름없게 된 ‘포인트’ 동작 때문이다. 이 동작을 완성하기 위하여 수많은 발레리나들이 어린 시절부터 매일같이 발톱이 빠지고 피가 흐르는 아픔을 참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포인트’ 동작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 테크닉이 최초로 도입된 발레 작품은 〈라 실피드〉이다. 요정과 인간의 사랑을 그린 이 발레는 낭만주의 발레의 장을 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추앙받고 있다. 인간에게 절망한 윌리들의 세계를 그린 로맨틱 발레의 절정 〈지젤〉이라든가, 미하일 포킨의 신고전주의 발레 〈레 실피드〉가 바로 이 〈라 실피드〉를 뿌리로 두고 있다.

1832년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된 〈라 실피드〉는 마리 탈리오니라는 스타를 탄생시켰다. 탈리오니는 초연 당시 발레리나 사상 최초로 포인트 기법을 시도하며 마치 중력에 구애받지 않는 양 발끝으로 서서 가볍게 날아다니는 요정의 모습을 묘사했다. “미풍처럼 무대 위로 날아와 엉겅퀴 털처럼 가볍게 떠다닌다”는 찬사를 받은 탈리오니의 춤은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낭만주의자들의 이상을 십분 만족시켰고, 그의 영향력은 발레라는 장르에서 벗어나 패션, 헤어스타일, 언어에까지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실피드 스타일〉이 유행하기에 이르렀고, 탈리오니는 서른이라는 만만치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실피드〉로, 시대의 여인으로 대접받았다.

하지만 마리 탈리오니는 실상 재능을 타고났다기보다는 만들어진 ‘스타’였다. 그의 뒤에는 아버지라는 조력자가 있었다. 마리의 매니저이자 안무가였던 필리포 탈리오니는 자신의 욕심과는 달리 춤에 있어 별반 재능을 보이지 못했던 딸에게 당시 발레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던 발끝으로 서는 포인트 기법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당사자이기도 하다. 여기에 덧붙여 필리포는 딸에게 동시대 도도하고 과시적인 여느 발레리나와는 차별된 겸손하고 절제미가 있으며 고상한 태도를 가지도록 가르쳤다.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이 결합되면서, 마리 탈리오니는 인간이 아닌 ‘천상의 여인’으로 그 시대 남자들의 마음을 한몸에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무대 위의 ‘천상의 요정’은 무대 아래에서는 한없이 세속적인 여인 그 자체였다. 까다롭고 변덕스런 성격, 거기에 끝모를 사치와 남성편력은 그를 요정이라 착각하고 결혼한 첫번째 남편인 부아쟁 공작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마흔네 살의 나이에 무대를 떠난 탈리오니는 갑부 연인들 사이를 요정처럼 떠다니다 결국 재정파탄으로 조그마한 무용교습소를 운영하며 우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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