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연극계 거장 피터 브룩 이후 최고의 연출가로 불리는 레프 도진(69)은 인간 마음속 깊숙이 숨어 있는 감정의 고갱이를 끄집어내는 데 탁월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그의 연극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제 마음속을 들여다본다.
레프 도진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을 이끌고 10~12일 서울 역삼동 엘지아트센터 무대에서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세 자매>를 선보인다. 한국에서 그가 체호프 작품을 올리는 것은 2010년 <바냐 아저씨> 이후 두번째다.
레프 도진은 스타니슬랍스키(1863~1938)와 메이예르홀트(1874~1940)가 이룬 러시아 리얼리즘 연극의 기반 위에 특유의 실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연극 언어를 보여주는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러시아 연극 최고 권위의 황금 마스크상을 세 번 받았고, 피터 브룩과 하이너 뮐러 등이 받은 유럽 연극상을 받았다. 1983년 말리극장 예술감독으로 취임해 피터 브룩이 극찬한 ‘세계 최고의 앙상블’로 키웠다.
체호프의 <세 자매>는 공연 시간이 3시간 가까이 되는 장막극이다. 러시아 지방 소도시를 배경으로 고향인 모스크바를 동경하는 아름다운 세 자매 올가, 마샤, 이리나와 그 주변인물들의 꿈과 이상, 사랑과 배신, 그리고 좌절을 희비극으로 그렸다.
도진은 2010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말리극장에서 <세 자매>를 처음 올리면서 원작의 큰 틀은 유지하면서 캐릭터들의 대사나 행동을 조금씩 바꾸어 등장인물들의 사랑과 욕망을 적극적으로 드러냈다. 공연 직후 현지 평단은 “오리지널 텍스트가 ‘상류사회에 대한 동경’을 그리고 있다면, 도진 버전은 현실에 지칠 대로 지친 세 자매의 ‘육체적이고도 정신적인 사랑의 동경’을 그리고 있다”고 평가했다.
도진은 한국 초연에 앞서 “<세 자매>는 체호프의 작품 가운데 가장 복잡한 희곡이며, 인간 삶의 총체적 모습을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인간 내면의 깊고도 다양한 얼굴을 표현한 체호프의 언어가 그만큼 어려운 텍스트라는 이야기다. 그는 “체호프가 창조해 낸 놀라운 캐릭터들을 통해 인간 존재의 한 차원 더 높은 의미를 찾고자 노력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이번 공연에서는 극 중 인물들의 절박한 현실을 보여주는 독특한 무대디자인이 눈여겨볼 만하다. 2010년 <바냐 아저씨>의 마지막 장면에서 허공 위의 건초더미가 내려와 주인공을 위로했다면, 이번에는 무대 뒷면에 있던 2층집이 공연이 진행되면서 차츰 객석 쪽으로 나와 무대와 인물을 통째로 삼켜버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현실 속에서 설 곳을 잃어가는 인물들의 상황을 보여주는 의미다. (02)2005-0114.
정상영 기자
chung@hani.co.kr, 사진 엘지아트센터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