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약한 시인의 것만 같던 촉촉한 눈빛이 걸그룹 앞에서 일순간 욕망으로 불타오른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뽐내는 야한 농담에 관객들은 쓰러지고 뒤이어 흘러나오는 ‘감성변태’의 선곡이란…. 유희열이야말로 금요일 밤의 황제가 아닐까. 한국방송 ‘유희열의 스케치북’ 제공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스케치북’ 4년 순항은
장르에 위계 두지 않고
음악이 주는 행복에 집중한
진행자 유희열의 자세 덕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
최선 다해 소개한 그는
우리 시대 ‘좋은 전달자’였다 2003년 무렵의 일이다. 새벽에 담배가 다 떨어져 편의점에 들른 나는, 매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잠시 귀를 의심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음알음하게 돌려 듣던 전설의 트랙, 손상미의 ‘킹카’가 새벽의 편의점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21세기에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신시사이저 반주, 라임(압운)도 플로(흐름)도 없이 무조건 빠르게만 말하는 래퍼, 한때 국악을 했던 손상미의 탁성이 듣는 이의 고막을 화끈하게 긁어주는 후렴구까지, 도무지 야심한 밤 한적한 편의점에서 흘러나올 음악은 아니었다. ‘인어 같은 몸매에 죽여주는 한 댄스로 발바닥 고무 탄내 나도록 비빌 거야’라는 가사는 또 어떤가. 가히 세기말적인 노래 ‘킹카’를 이 새벽에 틀어주는 정신 나간 라디오 디제이(DJ)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담배를 사고 난 뒤에도 잠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1분이 1시간 같았던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노래가 끝나자, 내 예상을 뒤집어엎고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겨진 명곡을 소개해 드리는 코너, 오늘 들려 드린 노래는 손상미씨의 ‘킹카’였습니다.” 세상에, 유희열이었어. 유희열이 라디오에서는 어떤 캐릭터였는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나에게, 새벽에 손상미의 ‘킹카’를 틀어주며 키득키득 웃는 유희열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유희열은 원맨 프로젝트 밴드 ‘토이’의 이미지가 전부였던 것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민감하게 다가오던 사춘기 시절, 토이의 3집 <기프트>(Gift)에 실린 곡 ‘외로움’(이혼한 부모님을 가진 아이들에게)이란 트랙을 몇 번이고 돌려 들으며 위안을 삼았던 나에게 유희열은 묵직한 발라드 음악을 만드는 진지한 천재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물론 3집에는 이승환과 지누가 불렀던 ‘애주가’라는 트랙도 있었고, 신해철이 버터 바른 듯한 느끼한 목소리로 불렀던 ‘마지막 로맨티스트’도 있었으므로, 유희열이 어느 정도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는 정도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새벽의 라디오에서 ‘킹카’라니. 그의 라디오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유희열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 직속 선배 신동엽의 그것과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의 야한 농담, 비쩍 마른 자신을 ‘병든 차인표’라고 부르고 가느다란 자신의 다리를 ‘곤봉다리’라고 칭하는 수준급의 자학 개그, <문화방송>(MBC) <올 댓 뮤직>(All that music)을 듣는 청취자들끼리 만나면 손가락을 콧구멍에 집어넣고 ‘에이티엠!’(ATM)이라고 외쳐야 한다는 기괴한 법칙을 태연자약하게 설파하는 뻔뻔함까지, 라디오에서의 유희열은 음악만 들었을 때의 유희열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이별에 아파하고 외로움 앞에서 담담해하던 발라드 가수에 대한 나의 환상이, 심야 라디오의 세계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쯤 되니 그 무렵 문화방송 티브이 시트콤 <논스톱4>에 출연해 특유의 경박한 개그감을 선보이기 시작하던 윤종신은 차라리 양반으로 보였다. 아마 그건 어린 나의 편견이었을 것이다. 발라드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인생의 비의를 이야기할 것만 같고, 차트를 점령한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이나 어르신들이 몸을 흔들 때나 듣는 트로트는 음악으로 안 쳐줄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편견. 그들도 사람일진대 희로애락이 없을 리 없고, 댄스든 트로트든 록이든 발라드든 장르와 정서의 차이가 있을 뿐 위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어린 나는 미처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희열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 <익숙한 그 집 앞>에서, 그는 취향을 가지고 위계를 따지고 누가 더 고상한지 따지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에 대해 고백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 왠지 고급스럽고 고상해 보이고, 대중가요를 좋아하면 왠지 싸 보이고 교양 없어 보인다는 생각. (중략) 취향에는 서열이 없다. 순위도 없다. 넌 왜 겨우 이런 취향을 가지고 사느냐고 따져서도 안 된다. 내가 좋아하면 그뿐, 굳이 다른 시선을 의식하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난 뒤 이 글귀를 다시 접했을 때, 나는 손상미의 ‘킹카’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니, 좋으면 새벽에도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왜 놀랐던 걸까. 이제 곧 200회를 맞이하는 <한국방송>(KBS)의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4년이란 세월을 순항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취향과 장르에 위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에 집중했던 진행자 유희열의 자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첫 회에서, 유희열은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로 시작해서 <이문세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를 거쳐 자신에 이르는 라이브 프로그램의 계보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점차 가수들이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그 공간이 음악 하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 공간이 갖는 의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가 정말 좋은 전달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좋은 전달자’라는 표현에 걸맞게, 유희열은 어떤 뮤지션이 나오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음악을 하는지를 소개하고 전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였을까.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유달리 출연하는 가수들의 스펙트럼이 넓은 프로그램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티브이 출연이 드물었던 오지은이나 언니네 이발관, 페퍼톤스와 같은 이들을 화면으로 접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였던 동시에, 카라 앞에서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환희를 감추지 못해 몸 둘 바를 모르는 유희열의 격한 리액션과, 아이유를 바라보며 끈적한 애정의 눈빛을 쏘아대던 유희열의 ‘매의 눈빛’을 함께 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 쇼이기도 했다. 장르가 무엇이고 경력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음악 앞에서 얼마나 진지한지, 그들이 얼마나 즐겁게 음악을 하는지였다. 다양한 취향과 장르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유희열의 환대 속에서, 이병우와 씨스타가, 이소라와 유브이(UV)가, 아이유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동등한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 위에서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애정고백과 야한 농담이 고상함과 경박함의 위계를 나누는 일 없이 자연스레 몸을 섞었고, 그것은 절묘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호스트 유희열의 덕목이었다. 더 많은 음악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유희열의 소신은 100회 특집이었던 ‘더 뮤지션’ 특집에서 정점을 찍었다. ‘더 프로듀서스’, ‘더 레이블’, ‘더 드라마’에 이은 대망의 100회, ‘더 뮤지션’은 그간 가수에 가려 응당 받아야 했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연주자와 코러스들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 연주자 함춘호에서 시작해, 베이스 연주자 신현권, 드럼 연주자 배수연, 색소폰 연주자 김원영, 해먼드오르간 연주자 김효국, 그리고 50년간 아코디언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살아있는 전설 심성락이 무대를 지배했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코러스를 담당했던 코러스 강성호, 김효수, 원현정은 메인 보컬
이 되어 ‘아이 노 코리다’를 열창했다.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들이 보다 더 대중적인 프로그램들에 밀려 자리를 내주고 사라져 가는 와중에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선보인 이 과감했던 특집은, 이 무대에선 음악을 사랑하는 이라면 음악의 장르나 포지션에 상관없이 누구라도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아마 유희열의 이런 음악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위계를 나누지 않는 취향에 대한 존중이, <유희열의 스케치북>을 200회까지 이끌어 온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4년간 변함없이 프로그램을 지켜준 우리 시대 가장 미더운 음악 큐레이터 유희열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감사와 축하를 보낸다.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장르에 위계 두지 않고
음악이 주는 행복에 집중한
진행자 유희열의 자세 덕분
다양한 스펙트럼의 음악
최선 다해 소개한 그는
우리 시대 ‘좋은 전달자’였다 2003년 무렵의 일이다. 새벽에 담배가 다 떨어져 편의점에 들른 나는, 매장 안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잠시 귀를 의심했다. 아는 사람들끼리만 알음알음하게 돌려 듣던 전설의 트랙, 손상미의 ‘킹카’가 새벽의 편의점을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저히 21세기에 나왔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충격적인 신시사이저 반주, 라임(압운)도 플로(흐름)도 없이 무조건 빠르게만 말하는 래퍼, 한때 국악을 했던 손상미의 탁성이 듣는 이의 고막을 화끈하게 긁어주는 후렴구까지, 도무지 야심한 밤 한적한 편의점에서 흘러나올 음악은 아니었다. ‘인어 같은 몸매에 죽여주는 한 댄스로 발바닥 고무 탄내 나도록 비빌 거야’라는 가사는 또 어떤가. 가히 세기말적인 노래 ‘킹카’를 이 새벽에 틀어주는 정신 나간 라디오 디제이(DJ)는 누구란 말인가. 나는 담배를 사고 난 뒤에도 잠시 자리를 뜨지 못하고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1분이 1시간 같았던 영겁의 시간이 지나고 노래가 끝나자, 내 예상을 뒤집어엎고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숨겨진 명곡을 소개해 드리는 코너, 오늘 들려 드린 노래는 손상미씨의 ‘킹카’였습니다.” 세상에, 유희열이었어. 유희열이 라디오에서는 어떤 캐릭터였는지 미처 잘 알지 못했던 나에게, 새벽에 손상미의 ‘킹카’를 틀어주며 키득키득 웃는 유희열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유희열은 원맨 프로젝트 밴드 ‘토이’의 이미지가 전부였던 것이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민감하게 다가오던 사춘기 시절, 토이의 3집 <기프트>(Gift)에 실린 곡 ‘외로움’(이혼한 부모님을 가진 아이들에게)이란 트랙을 몇 번이고 돌려 들으며 위안을 삼았던 나에게 유희열은 묵직한 발라드 음악을 만드는 진지한 천재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여졌다. 물론 3집에는 이승환과 지누가 불렀던 ‘애주가’라는 트랙도 있었고, 신해철이 버터 바른 듯한 느끼한 목소리로 불렀던 ‘마지막 로맨티스트’도 있었으므로, 유희열이 어느 정도 장난기가 있는 사람이겠거니 하는 정도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렇지, 새벽의 라디오에서 ‘킹카’라니. 그의 라디오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듣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유희열의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학교 직속 선배 신동엽의 그것과 비견할 수 있는 수준의 야한 농담, 비쩍 마른 자신을 ‘병든 차인표’라고 부르고 가느다란 자신의 다리를 ‘곤봉다리’라고 칭하는 수준급의 자학 개그, <문화방송>(MBC) <올 댓 뮤직>(All that music)을 듣는 청취자들끼리 만나면 손가락을 콧구멍에 집어넣고 ‘에이티엠!’(ATM)이라고 외쳐야 한다는 기괴한 법칙을 태연자약하게 설파하는 뻔뻔함까지, 라디오에서의 유희열은 음악만 들었을 때의 유희열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이별에 아파하고 외로움 앞에서 담담해하던 발라드 가수에 대한 나의 환상이, 심야 라디오의 세계 앞에서 산산조각이 난 것이다. 그쯤 되니 그 무렵 문화방송 티브이 시트콤 <논스톱4>에 출연해 특유의 경박한 개그감을 선보이기 시작하던 윤종신은 차라리 양반으로 보였다. 아마 그건 어린 나의 편견이었을 것이다. 발라드를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윽한 눈빛으로 인생의 비의를 이야기할 것만 같고, 차트를 점령한 아이돌 그룹의 댄스곡이나 어르신들이 몸을 흔들 때나 듣는 트로트는 음악으로 안 쳐줄 것만 같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의 편견. 그들도 사람일진대 희로애락이 없을 리 없고, 댄스든 트로트든 록이든 발라드든 장르와 정서의 차이가 있을 뿐 위계가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지극히 단순한 이치를, 어린 나는 미처 납득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희열이 직접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 <익숙한 그 집 앞>에서, 그는 취향을 가지고 위계를 따지고 누가 더 고상한지 따지는 이들에 대한 반발심에 대해 고백했다.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면 왠지 고급스럽고 고상해 보이고, 대중가요를 좋아하면 왠지 싸 보이고 교양 없어 보인다는 생각. (중략) 취향에는 서열이 없다. 순위도 없다. 넌 왜 겨우 이런 취향을 가지고 사느냐고 따져서도 안 된다. 내가 좋아하면 그뿐, 굳이 다른 시선을 의식하거나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난 뒤 이 글귀를 다시 접했을 때, 나는 손상미의 ‘킹카’를 들으며 충격을 받았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아니, 좋으면 새벽에도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왜 놀랐던 걸까. 이제 곧 200회를 맞이하는 <한국방송>(KBS)의 라이브 음악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4년이란 세월을 순항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취향과 장르에 위계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음악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고 즐겁게 만들어줄 수 있는가에 집중했던 진행자 유희열의 자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첫 회에서, 유희열은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로 시작해서 <이문세쇼>, <이소라의 프로포즈>, <윤도현의 러브레터>, <이하나의 페퍼민트>를 거쳐 자신에 이르는 라이브 프로그램의 계보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점차 가수들이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는 추세 속에서 그 공간이 음악 하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이었다. “이 공간이 갖는 의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제가 정말 좋은 전달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좋은 전달자’라는 표현에 걸맞게, 유희열은 어떤 뮤지션이 나오든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음악을 하는지를 소개하고 전달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였을까.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유달리 출연하는 가수들의 스펙트럼이 넓은 프로그램이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티브이 출연이 드물었던 오지은이나 언니네 이발관, 페퍼톤스와 같은 이들을 화면으로 접할 수 있는 귀중한 통로였던 동시에, 카라 앞에서 잇몸을 드러내고 웃으며 환희를 감추지 못해 몸 둘 바를 모르는 유희열의 격한 리액션과, 아이유를 바라보며 끈적한 애정의 눈빛을 쏘아대던 유희열의 ‘매의 눈빛’을 함께 볼 수 있는 버라이어티 쇼이기도 했다. 장르가 무엇이고 경력이 얼마나 되었는가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오로지 그들이 음악 앞에서 얼마나 진지한지, 그들이 얼마나 즐겁게 음악을 하는지였다. 다양한 취향과 장르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 유희열의 환대 속에서, 이병우와 씨스타가, 이소라와 유브이(UV)가, 아이유와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이 동등한 박수를 받으며 무대를 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유희열의 스케치북> 무대 위에서는 음악에 대한 진지한 애정고백과 야한 농담이 고상함과 경박함의 위계를 나누는 일 없이 자연스레 몸을 섞었고, 그것은 절묘한 균형을 잡을 줄 아는 호스트 유희열의 덕목이었다. 더 많은 음악을 더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유희열의 소신은 100회 특집이었던 ‘더 뮤지션’ 특집에서 정점을 찍었다. ‘더 프로듀서스’, ‘더 레이블’, ‘더 드라마’에 이은 대망의 100회, ‘더 뮤지션’은 그간 가수에 가려 응당 받아야 했던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연주자와 코러스들을 주인공으로 세웠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타 연주자 함춘호에서 시작해, 베이스 연주자 신현권, 드럼 연주자 배수연, 색소폰 연주자 김원영, 해먼드오르간 연주자 김효국, 그리고 50년간 아코디언을 손에서 놓지 않은 살아있는 전설 심성락이 무대를 지배했다. 언제나 무대 뒤에서 코러스를 담당했던 코러스 강성호, 김효수, 원현정은 메인 보컬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