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성 화백이 4일 자신이 갑골문을 응용해 만든 ‘소산체’를 설명하고 있다. 이날 선보인 대련 가운데 뒷구절이 거꾸로 전시돼 바로잡았다.
수묵화가 박대성 개인전
경주서 ‘자발적 유배’ 20년
추사체와 마오의 초서 연마
강한 선·부드러운 번짐 대비
붓글씨 정신을 그림에 투사
“음양조화·디자인 접목했다”
경주서 ‘자발적 유배’ 20년
추사체와 마오의 초서 연마
강한 선·부드러운 번짐 대비
붓글씨 정신을 그림에 투사
“음양조화·디자인 접목했다”
“경주 남산에 오르면 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곳에 널린 암각화에는 신라인들이 칼끝으로 새긴 획이 살아있지요.”
1994년 경주에 내려간 이래 20여년 동안 ‘자발적인 유배생활’을 하는 수묵화가 박대성(65) 화백이 그동안의 작업을 모아 전시를 열고 있다. 종로구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원융, 소산 박대성 개인전’(11월24일까지)에 8m에 이르는 대작 <불국 설경>부터 조선시대 다완을 그린 2m 크기의 <고미> 등 수묵화들과 함게 갑골문자에서 얻은 서예작품까지 50여점의 작품을 걸었다.
단연 눈길을 끄는 것은 불국사와 남산. <불국 설경>(800×252㎝)과 <남산>(280×270㎝)을 보면 그가 소재로 삼은 대상의 정확한 앉음새와 모양새가 칼칼한 선과 부드러운 번짐으로 묘사된 것이 마치 목판화 같다.
“제 그림은 음양조화와 여백에 현대적 디자인 개념이 들어가 있지요. 그것을 추구하기에는 경주가 가장 적절합니다. 동해바람이 토함 육산과 만나면서 신라 천년의 문화가 꽃이었고, 그 자취가 불국사와 남산에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계 화단의 요체를 체득하기 위해 1994년 뉴욕으로 갔다. 거기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깨치고 1년 만에 돌아와 바로 짐을 싸들고 경주로 내려갔다. 불국사 요사채에서 한 해 동안 머문 다음 남산 밑에 둥지를 틀었다. 경애왕릉이 코앞인 곳이다.
“20년 동안 아침 남산에 오르는 것이 첫 일과입니다. 살아있는 박물관을 산책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리죠.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에 앞서 2시간씩 추사체와 마오쩌둥의 초서를 연마했어요. 그것이 그림의 바탕입니다.”
그의 시도는 글씨와 그림이 일체화한 시기를 몸으로 체험하기. 추사를 깨치고 바위에 새겨진 상형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갔다. 한자가 고도로 추상화한 그림이어서 붓글씨에 담긴 정신과 퍼포먼스를 그림에 투사하는 방법이 최고의 화법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붓 봉(鋒)자는 쇠금변을 갖고 있지요. 붓은 바위에 글씨를 새기던 칼이 종이가 발명된 얻은 뒤에 종이에 적응한 도구입니다. 갑골문이나 비림의 글씨에 초기 붓놀림의 자취가 그대로 남아있어요.”
그가 오랫동안 추사를 공부한 뒤끝인 1988년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중국을 여행하면서 추사도 경험하지 못한 갑골문의 세계를 만나게 된다. 그가 학력란에 늘 ‘실크로드’와 ‘북한 기행’ 두가지를 적는 것도 그런 이유다. 경주로 내려간 데는 한 가지 의문을 가지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도 한몫을 했다.
“불국사는 속세에서 이상세계로 가는 배인 ‘용화선’을 형상화했어요. 청운교가 용의 앞다리, 백운교가 뒷다리를 빼닮았어요.” 불국사 설경은 한자리에서 결코 잡을 수 없는 용의 형상을 세 시점에서 잡아내 한폭의 그림에 녹였다. 10여년 현장에 머물면서 잡아낸 불국사의 고갱이다.
그가 쓰는 종이는 옥판선지. 물푸레 나무를 원료로 만든 중국산 생지다. 한지에 떨어진 먹이 그 자리에 머무는 반면 옥판선지는 금새 번져 붓놀림이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으면 그림을 버리게 된다. 한지에서 연마한 자유자재의 붓놀림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재료로, 국내에서는 박노수 화백이 유일하게 썼을 뿐이라고 한다.
“추사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은 게 천만 다행입니다. 만일 그분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저의 설자리가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는 요즘 추사와 마오 글씨를 졸업하고 한나라 이전의 고체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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