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무대X파일 - 재즈와 클래식의 위대한 결합
재즈 100년사에서 듀크 엘링턴만큼 다양한 기록의 보유자도 드물다. 빅밴드의 거장이자 심포닉 재즈의 완성자, 그리고 재즈 피아니스트였던 그가 남긴 기록 가운데에서도 출중한 것으로 우선 작곡 건수를 들 수 있다. ‘재즈계의 바흐’에 비견되는 그는 50여년이 넘도록 무대에 서면서 무려 6천여곡의 재즈를 작곡했다. 바흐가 남긴 곡이 1300여곡, 모차르트가 630여곡인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분명 대단한 기록이다.
그는 당대 아티스트들과는 약간 다른 노선을 추구했다. 다른 아티스트들이 연주가로서 먼저 명성을 날렸던 것과 달리 듀크 엘링턴은 “흠잡을 데 없는 작곡”으로 인정을 받았다. 미국 음악사에서 엘링턴이 살았던 1899년부터 1974년은 모든 장르를 통털어 가장 중요한 성취를 했던 시기로 취급된다. 엘링턴의 전기를 쓴 음악비평가 제임스 링컨 콜리어는 엘링턴을 미국 현대음악 작곡가인 찰스 아이브스와 함께 미국 음악사에서 있어 가장 중요한 음악가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는 역으로 그가 뛰어난 연주가는 아니었다는 사실을 반추한다. 엘링턴의 피아노 실력은 탁월한 정도는 아니었다. 음악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은 물론 악보를 무서워했다고 전해진다. 그가 이런 한계를 극복하고 자신의 작곡의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던 것은 자신의 악단이다. 여기서 그가 갱신한 또다른 기록이 드러난다.
금전 혹은 음악적 개성과 이해관계를 문제로 당대 수많은 재즈 밴드들이 결성과 해체를 반복하고 있을 무렵 듀크 엘링턴의 빅밴드 멤버들은 일단 가입을 하면 죽을 때까지 함께 했다. 특히 1939년에 가입해 1967년에 사망한 빌리 스트레이혼은 28년을 엘링턴과 함께 하면서 작곡을 도와주었으며 거의 양아들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듀크 엘링턴은 정작 자신의 친아들은 돌보지 않았다). 조니 호지스 또한 그와 일평생을 같이 한 멤버 중 한 명이었다.
다분한 카사노바 기질에 가정을 홀대했던 엘링턴은 살아 생전 무수한 법적, 사실적 부인들에게 원망과 지탄을 받았다. 그는 그대신 가족에게 쏟을 법한 애정을 “나의 소중한 악기”라 칭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에게 쏟았다. 언제나 온화하고 기품있는 매너로 동료들을 상대하는 엘링턴을 멤버들은 일찍부터 ‘듀크(DuKe 공작)’라는 애칭으로 불렀으며, 이 애칭은 그의 실명인 에드워드 케네디 엘링턴보다도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재즈가 차별에 대한 저항과 반역에서 출발한 예술이라지만, 엘링턴은 오히려 흑인으로서의 남다른 자부심에서 재즈를 시작한 특이한 인물이었다. 정치적으로 흑인들이 보호를 받던 워싱턴 출신인 엘링턴은 ‘듀크’라는 애칭만큼이나 흑인이라는 인종에 대해 자신감이 넘쳤으며 백인전용 클럽에서 밴드생활을 하면서 같은 흑인 가운데에서도 우월한 위치에 있음을 내내 확신했다. 음악적으로도 그는 일개 연주가가 아닌 시대에 남을 작곡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1933년 영국을 방문한 엘링턴은 일개 연주가가 아닌 라벨이나 델리우스와 같은 클래식의 ‘작곡가’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실제로 혹자들은 재즈와 클래식의 위대한 결합(이른바 심포닉 재즈)이 <랩소디 인 블루>를 쓴 거슈인이 아닌 듀크 엘링턴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평한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관련기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