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영화, 드라마 등에서 북한문화와 북한말 감수 활동을 하고 있는 채수린씨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다. 북한에서 평양예술대학 손풍금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최근 공연중인 연극 <목란언니>에서도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한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나도 문화인 <25>북한문화 감수 채수린씨
탈북 뒤 남한생활 고통 겪은
자신 삶 소재 연극 ‘목란언니’
음악감독 맡고 아코디언 연주
“북한 이미지 과장하지 말고
똑같은 이웃임을 보여줘야”
탈북 뒤 남한생활 고통 겪은
자신 삶 소재 연극 ‘목란언니’
음악감독 맡고 아코디언 연주
“북한 이미지 과장하지 말고
똑같은 이웃임을 보여줘야”
지난 19일부터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무대에 오른 연극 <목란언니>는 남한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한 여성 탈북자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평양예술학교에서 손풍금(아코디언)을 전공한 조목란은 뜻하지 않은 사고에 휘말려 한국에 오게 된다. 그는 북한에 있는 부모를 서울로 데려와 준다는 브로커에게 속아 정착금과 임대아파트의 보증금까지 사기를 당한 뒤 한국에서의 삶에 회의를 느끼고 북한으로 돌아가려 한다.
이 연극은 공연에서 직접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탈북자 채수린(53)씨의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 연극에서 북한문화와 북한말 지도를 맡고, 음악감독으로도 참여하고 있다. 그동안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님은 먼 곳에>, <베를린> 등 20여편, 연극 <장석조네 사람들>, <순우삼촌> 등 20여편, 텔레비전 드라마 <더 킹 투 하츠>, <뿌리깊은 나무> 등 10여편에 참여해온 북한문화 및 북한말 감수 전문가다.
“제가 북한 관련 영화와 드라마, 연극을 하게 된 것은 남한 사람들이 북한을 너무 그들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불만이어서였습니다. ‘통일되면 다 알아’라고 말하지만 저는 통일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중의 하나가 매스컴이고 문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북한 관련 영화는 한국 감독, 한국 프로젝트, 한국 돈이 만드는데 마지막은 꼭 한국 시각인 거예요. 속상해 죽겠어요. 그래서 방법을 생각해낸 것이 북한문화와 북한말 감수였어요.”
그는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색다르게 보고 자신들의 눈에 맞추려고 한다”고 말했다. “북한 사람들을 거지 같지 않으면 많이 떨어지는 사람으로밖에 안 그린다”고 할 때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다.
연극 <목란언니>의 소재는 그가 지난해 극작가 김은성(36)씨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왔다. 김 작가가 눈에 띄게 수척해진 그에게 “누나, 왜 아파?”라고 물어서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가 너무 힘들다”며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겪었던 고생을 털어놓았다. 김 작가가 대본을 쓰고 전인철씨가 연출을 맡아 그해 3월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됐다. “남북문제를 젊고 새로운 시각으로 그렸다”는 평단의 호평과 함께 대한민국 연극대상 ‘작품상’과 한국연극평론가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 3’, 월간 <한국연극> 선정 ‘공연 베스트 7’ 등을 휩쓸었다.
그가 북한문화와 북한말 감수를 처음 시작한 것은 2005년 박광현 감독의 영화 <웰컴 투 동막골>부터다. 본래 이 작품은 처음에는 2002년 12월 영화감독 장진씨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아 연극 무대에 올려졌다. 그는 “연극을 보고 끝없이 울었다”고 그때를 떠올렸다.
“그전에 북한 관련 영화 몇편을 보고 솔직히 화가 날 때가 있었어요.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너무 이색적으로 그리는 거예요. 코미디로 만들지 않아도 절제된 것 속에서 코미디가 나올 수 있지 않나요?”
그는 “북한 사람을 다루는 공연이 과장하지 않고 제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장진 감독이 영화로 하고 싶다고 했을 때 솔직하게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고 당시 사연을 들려주었다.
그는 1999년 북한에서 넘어와 한국 생활을 시작했다. 인텔리 집안 출신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손풍금을 배워 평양예술대학 손풍금과를 졸업했다. 그동안 남한 생활에 적응하기까지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강연하러 다니면서 인격적으로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다. 사기를 당해서 정착금을 다 날린 뒤 우울증에 걸려 죽음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저는 고향을 떠났을 때 당신들이 손을 내밀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입니다. 지나가는 거지라도 쪽박은 안 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치이다 보니까 나중에는 내 스스로 나를 못 이기겠더라고요.”
그는 요즘 단국대 천안캠퍼스 생활음악과에서 실용음악을 가르친다. 학생들로부터 ‘엄마 같은 교수님’으로 인기가 높다. 그는 “최신 북한 정보을 얻기 위해 막 북한을 떠나온 생짜 얼치기 탈북자를 찾아다니며 연구한다”고 귀띔했다.
“제가 참여하는 영화, 연극, 드라마는 어떻게든 한 장면이라도 더 진정한 사실을 그리도록 만들려고 해요. 100편의 영화를 하면 100개의 진정한 사실이 만들어지겠죠. 제가 직접 작품을 쓸 수는 없지만 감수 작업을 통해 당신들과 말을 똑같이 하는 이웃이 옆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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