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의 김지훈 작가(왼쪽)와 김광보 연출가. 연극계 10년 선후배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질적인 조합이었지만 연극을 만들면서 서로의 작업세계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국립극단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남성세계에 맞서는 여성들 이야기
5시간 분량 대본이 절반으로 ‘뚝’
남성세계에 맞서는 여성들 이야기
5시간 분량 대본이 절반으로 ‘뚝’
지독한 난산이었다.
한국 연극계에서 기가 세기로 소문난 두 사람이 부딪혔으니 불꽃이 아니 일 수 없었다. 여덟달 동안 대본을 11번이나 고치면서 원래 대본 내용의 절반이 떨어져 나갔다. 27일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극단의 신작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은 그렇게 힘들게 나왔다. 방대한 서사를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김지훈(34) 작가와 담백하고 간결한 미장센을 추구하는 김광보(49) 연출가가 만난 결과물이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난해 연말 발표되자마자 연극계의 화제였다. 작가 김지훈씨는 <원전유서> <풍찬노숙> <양날의 검> 등에서 자신감 넘치는 언어 표현과 거침없는 상상력으로 거대 담론을 풀어놓으며 주목받은 작가. 연출가 김광보씨는 <인류 최초의 키스>, <프루프>, <에쿠우스>,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동토유케> 등에서 최소한의 것으로 본질을 드러내는 미니멀리즘의 달인으로 평가받았다. 올해 <그게 아닌데>로 대한민국 대부분의 연극상을 휩쓸기도 했다.
“2월 일본 여행 중에 대본을 전달받아 밤새 읽는데 저절로 ‘어이쿠’ 비명이 터져나왔습니다. 김지훈 작가의 인문학적 지식은 잘 알고 있었지만 내용이 너무 방대했어요. 완전히 블록버스터에다 판타지가 첨가되어서 굉장했습니다.”
김광보 연출가는 이번처럼 몸무게가 많이 빠진 적이 없었다고 했다. “작가 스스로 절반을 줄인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인데 잘 이해해줘서 고맙죠.”
그러자 김지훈 작가는 “오랫동안 제 작품에 대해 고민했던 화두를 풀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다 보니 5시간 가까운 분량이 됐었다”며 연출자에게 미안해했다. “처음 <원전유서>를 쓸 때 제 30대의 모든 것을 담았어요. 그때 연희단거리패 이윤택 선생님이 ‘넌 이걸 해놓고 10년은 고생할 것’이라고 하셨어요. 저는 ‘그럴 리 없습니다. 매번 바뀔 겁니다’고 대꾸했는데 그 말씀이 맞더라고요. 제 생각을 다 소모하고 새로 채워놓아야 했는데 그게 30대에는 안 되는 어떤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 틀에서 벗어나려고 쓴 게 바로 <전쟁터…>입니다.”
김 연출가는 “올해 4월 140페이지로 첫날 연습을 마치고 술집에 가면서 김 작가에게 ‘어쩌면 너와 나는 이질적인 조합이다. 완전히 실패할 수도 있고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말했더니 김 작가도 고개를 끄덕이더라”며 껄껄 웃었다.
<전쟁터…>는 시대를 알 수 없는 상상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나라를 세우려고 끝없이 전쟁을 벌이는 ‘도련님’(이승주), 그의 정적인 ‘대장군’(이호재), ‘독선생’(김재건), ‘늙은 유자’(오영수)의 갈등과 암투를 그린다. 그리고 전쟁터를 점령해 땅을 일구려는 화전민 여인들(길해연, 황석정, 김정영)을 삶을 대비해서 보여준다.
김 작가는 “2011년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이놈의 역사는 쳇바퀴 돌듯 똑같더라”며 “처음에는 잘해보자더니 나중에 망할 때는 곪을 대로 곪는 게 동서고금이 매한가지”더라고 집필 계기를 설명했다. “사실상 남성적인 이야기인 건국 이야기를 계급보다 더 값지고 의미 있는 모성으로 덮어버리면 어떨까 하는 전복적인 상상을 해봤다”는 것이다. 김 연출가는 이를 “무지막지한 남성세계에서 배척당해도 맞서 싸워나가는 여성들이 보여주는 감동”이란 주제로 뽑아냈다. “대지와도 같은 여인들이 죽음으로 이 상황을 껴안고 모든 것을 승화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12월8일까지, 1688-5966.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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