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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악보 해결사, 나 없으면 연주회도 없을 걸요?

등록 2013-12-05 20:18수정 2013-12-06 09:32

‘좋은 악보’는 ‘좋은 연주’의 시작이다. 김보람 악보 전문위원이 서울시향 악보실에서 다음 공연에 준비할 악보를 점검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좋은 악보’는 ‘좋은 연주’의 시작이다. 김보람 악보 전문위원이 서울시향 악보실에서 다음 공연에 준비할 악보를 점검하고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문화'랑'] 나도 문화인
(27) 악보 전문위원 김보람씨
2008년 10월 초의 일이다. 서울시립교향악단 진은숙 상임작곡가의 <아르스 노바 Ⅲ> 연주회를 2주 정도 앞두고 메시앙의 <독주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7개의 하이카이> 첫 연습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연습날 이틀 전, 서울시향 악보전문위원실에 한 관악 연주자로부터 다급한 연락이 왔다. 해외여행 중에 공연용 악보를 호텔 객실에 놔둔 채 귀국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자주 연주되지 않는 현대음악가의 악보는 구하기가 힘들다. 시향 쪽은 급히 외국 출판사에 연락해 그 악보를 디지털 파일로 전달받아 연주용 악보를 다시 작성했다. 덕분에 연습은 예정대로 진행되었지만, 연주회를 코앞에 두고 차질을 빚을 수도 있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정확하고 보기 편한 악보 확보
곡 해석해 파트별로 나눠 배분
현대음악 특수악기 많아 더 신경
“전문지식보다 대인관계 더 중요”

당시 이 문제를 해결한 주인공이 김보람(31) 서울시향 악보 전문위원이다. 일반인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교향악단의 숨은 전문 인력인 악보 전문위원은 오케스트라의 역량과 연주회의 성공에 중요한 구실을 한다. 연주의 생명인 곡의 선정과 해석은 모두 악보를 통해 이뤄지기 때문이다. 악보 전문위원은 연주 프로그램이 확정되면 악보를 확보하고, 이를 다시 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해석하는 일을 한다. 그리고 각 연주 파트에 맞게 악보를 분리해 연주할 수 있도록 구성한다.

현재 서울시향에선 김보람 위원과 김진근(39) 전문위원이 연주하는 모든 악보를 책임지고 있다. 현대음악의 경우 특수한 악기가 쓰이는 경우가 많아 미리 악보를 파악하고 분석해 공연기획팀에 해당 연주자를 확보할 수 있도록 알려줘야 한다. 편성에 따라 연주자들이 필요로 하는 악보를 따서 옮겨주기도 한다. 베토벤 <교향곡 9번> 연주회처럼 악장 중간에 성악가들이 나오는 경우에는 입장 시점을 알려주는 큐 사인도 한다. 악보 전문위원이 없으면 곧 오케스트라 연주가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김보람 위원은 “가장 큰 업무는 ‘좋은 악보’를 확보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지휘자가 공연 프로그램을 정하면 공연 석달 전부터 해외 악보 전문 출판사들을 검색해 악보를 구입하거나 대여해야 합니다. 같은 악보라도 국적이나 시대에 따라 표기하는 명칭이 다를 수 있고, 버전도 여러 가지입니다. 또 페이지 넘기기가 불편하거나 오류가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걸 찾아내서 우리가 연주할 곡의 가장 보기 편한, 좋은 악보를 마련하는 게 제 임무라고 할 수 있죠.”

김 위원은 주로 독일의 ‘부시 앤 호크스’나 ‘쇼트 뮤직’, 미국의 ‘셔머출판사’, 프랑스 ‘뒤랑출판사’ 등에서 악보를 구입한다. 초반에는 외국 출판사의 사정에 어두워서 시행착오도 많았다고 한다. 요즘은 클래식 작품별 버전 정보를 수록한 데이비드 대니얼스의 ‘오케스트럴 뮤직’과 출판사별 악보 정보가 많은 미국의 악보 전문위원들의 연합인 ‘MOLA’의 누리집을 주로 활용한다. 최근에는 국내에도 악보 전문 대여업체가 생겨 다소 수월해진 편이라고 한다.

악보를 구입하면 가장 먼저 작곡가가 곡에 어떤 악기가 나와야 하는지 표기하는 편성표에 맞게 각 파트의 악보가 제대로 왔는지를 확인한다. 간혹 어렵게 구한 악보가 잘못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페이지가 누락된 악보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사전 점검 때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지금은 악보 전문가가 되었지만 원래 그는 트롬본 전공자였다. 2005년 대학 졸업 당시 은사인 트롬본 주자 이철웅(현 연세대 교수)씨의 권유로 서울시향 악보실에 인턴으로 입단했다. 그는 “연주가 활동보다는 어렸을 때부터 팬이었던 서울시향과 마에스트로(정명훈 지휘자)와 함께하는 것이 더 보람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서울시향에서 30년간 악보 담당을 해왔던 이석(성남시향 악보 전문위원)씨로부터 2년 남짓 악보 일을 배워 2007년에 공채로 들어가 8년째 근무하고 있다.

그는 “악보 담당자가 전문성을 요하는 업무임에도 국내에 전문 교육과정이나 기관이 아직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시장 규모가 작아 전문가를 키우기 어려운 상황이다 보니 지방 교향악단에선 연주자가 악보 담당을 겸직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현장 훈련과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학교의 합주단이나 지역사회의 오케스트라에서 처음 일을 시작하거나, 오케스트라 안에서 악보 담당자의 지도 아래 보조 인력으로 일을 배우는 것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어요.”

악보 전문가에게 악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최우선. 거기에 더해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대인관계와 각종 자료를 얻을 수 있는 인맥 관리 등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들은 잘 모르는 이 길을 걷는 그는 “공연이 끝나고 지휘자와 연주자 앞의 보면대에서 악보를 치우며 보람을 느낀다”며 웃었다. 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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