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숙희 국립민속국악원 장악과장은 조선 시대 옛 악기와 의상을 복원해 재현하는 전문가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 국악박물관 악기 제작 공방 전시실에서 만난 그가 2010년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새겨진 백제금(거문고)을 복원한 악기를 설명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문화'랑'] 나도 문화인
(29) 국악 복식·악기 복원가 이숙희씨
(29) 국악 복식·악기 복원가 이숙희씨
지난 5월, 서울 경복궁 근정전에서는 세종대왕 탄신 616주년을 기념해 ‘세종조 회례연’(會禮宴)이 성대하게 열렸다. 악사 240여명과 무용수 160여명 등 400여명이 출연한 거대한 규모였다. 회례연은 조선시대에 해마다 정월 초하루에 임금이 신하들의 노고를 위로하기 위해 열었던 행사로, 오늘날의 ‘시무식’ 같은 연회다.
‘세종조 회례연’은 국립국악원이 <악학궤범>과 <세종실록>의 기록을 바탕으로 고증해 2008년 5월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580여년 만에 복원하며 되살아났다. 그리고 이젠 국립국악원의 대표 브랜드 공연으로 자리잡았다. 6세기를 뛰어넘는 감동과 문화적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이 행사를 복원한 이가 국립국악원의 이숙희(53) 학예연구관이다. 국내에선 드문 옛 악기와 옷을 복원해내는 전문가다.
“‘세종조 회례연’은 세종께서 1424년부터 9년여에 걸쳐 아악의 정리, 신악의 창제 등을 통해 ‘조선의 소리 찾기’라는 음악적 연구와 성과를 발표했던 세종 15년(1433년) 정월 초하루의 연회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禮)와 악(樂)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문화국가를 꿈꿨던 세종의 뜻을 오늘에 되살리고 싶었어요. 너무 다행스럽게 <세종실록>과 <악학궤범>에 거의 완벽하게 기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 절차와 복식을 다 복원했지요.”
복원한 고대 악기만 16종류
무에서 유 창조한 것과 같아
“악학궤범 새로 펴내는 게 꿈
사람 사귀는 것보다 재밌어요” 지난 17일 남원민속국악원에서 만난 그는 복원을 통해 과거와 현대를 잇는 것이 국악연구자로서 보람이라고 자기 일을 설명했다. 이숙희 연구관은 2010년 6월에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조각된 다섯 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악기를 복원했다. 백제고(북), 백제적(피리), 완함(비파), 백제소(피리), 백제금(거문고) 등 백제의 선율이 1500여년 만에 되살아났다. 향로에 조각된 악사 장식의 크기는 불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악기의 정체는 파악조차 힘들었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한 기간은 1년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때 저는 연구책임자로 악기 복원을 주도했을 뿐 실제로는 다른 전문가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국립국악원과 부여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너무 칭찬을 많이 하시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속으로 ‘아, 그래도 알아주시는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복원한 고대 악기는 16종에 이른다. 악기만이 아니라 제례악과 연례악 등의 복식도 함께 재현하고 복원한다. 하지만 그는 “연구자로서 이론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원래 그의 전공은 가정학이었다. 그런데 졸업할 무렵, “취업과 결혼을 선택할 시기에 적절한 길이 보이지 않”는 갈림길에 섰다. 고민 끝에 그는 “인생을 재구성하고 재설계”해보기로 결심했고, 관심이 많았던 국악으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 국악과에 다시 입학해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러면서 국악 이론에 빠져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뒤 1995년 국립국악원에 몸을 담았다. 그 스스로 “사주팔자에 국악을 하라고 되어있었던 것 같다”고 웃는다. 국악과 관련된 악기와 의상을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 뒤로 그는 틈만 나면 <악학궤범>을 들여다본다. 1493년 조선 성종 때 예부터 전해내려오던 의궤(儀軌·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은 ‘국악의 바이블’ 같은 책이다. 197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악학궤범>을 간행했고, 그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이를 보완한 <신역 악학궤범>을 냈는데, 이 당시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국악학자인 고 이해구 박사를 도와 교정작업을 했다. 그는 “그 일은 운명이고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문화원형콘텐츠사업을 하면서 연구자로 저를 지명했습니다. 제가 <신역 악학궤범> 교정작업을 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고 추천한 거죠. 1년여간 문화원형콘텐츠 작업을 하면서 국악이론의 새로운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야금의 형태는 <악학궤범> 권 7에 있습니다. 또 가야금 연주자가 입는 복식의 형태와 색깔은 권 9에 있고 앉아 있는 위치는 권 2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을 다 모아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지식이 확 늘었어요.” 그는 “그 작업을 하면서 방대한 <악학궤범>의 지식을 자기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시간에 쫓겨 미숙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보완하고 세밀한 디테일을 찾아내는 작업을 10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학궤범>을 책으로 새롭게 펴내는 것은 그에게 평생의 꿈이 됐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재미를 못 느끼지만 이 일만은 고달프더라도 재미가 있어요. 정직하니까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 같아요. 사람도 공을 들이면 될 텐데 제 성격 탓인지 아직 결혼할 의욕은 생기지 않아요. 다 사주팔자인가 봐요.” 남원/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무에서 유 창조한 것과 같아
“악학궤범 새로 펴내는 게 꿈
사람 사귀는 것보다 재밌어요” 지난 17일 남원민속국악원에서 만난 그는 복원을 통해 과거와 현대를 잇는 것이 국악연구자로서 보람이라고 자기 일을 설명했다. 이숙희 연구관은 2010년 6월에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에 조각된 다섯 명의 악사가 연주하는 악기를 복원했다. 백제고(북), 백제적(피리), 완함(비파), 백제소(피리), 백제금(거문고) 등 백제의 선율이 1500여년 만에 되살아났다. 향로에 조각된 악사 장식의 크기는 불과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악기의 정체는 파악조차 힘들었다. 다른 분야 전문가들과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부한 기간은 1년에 이르렀을 정도였다. “그때 저는 연구책임자로 악기 복원을 주도했을 뿐 실제로는 다른 전문가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국립국악원과 부여에서 연주회를 했는데 너무 칭찬을 많이 하시기에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해요. 속으로 ‘아, 그래도 알아주시는구나’ 하고 기뻐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복원한 고대 악기는 16종에 이른다. 악기만이 아니라 제례악과 연례악 등의 복식도 함께 재현하고 복원한다. 하지만 그는 “연구자로서 이론을 제공했을 뿐”이라고 손사래를 친다. 원래 그의 전공은 가정학이었다. 그런데 졸업할 무렵, “취업과 결혼을 선택할 시기에 적절한 길이 보이지 않”는 갈림길에 섰다. 고민 끝에 그는 “인생을 재구성하고 재설계”해보기로 결심했고, 관심이 많았던 국악으로 전공을 바꿨다. 대학 국악과에 다시 입학해 가야금을 전공했다. 그러면서 국악 이론에 빠져들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뒤 1995년 국립국악원에 몸을 담았다. 그 스스로 “사주팔자에 국악을 하라고 되어있었던 것 같다”고 웃는다. 국악과 관련된 악기와 의상을 복원하는 일을 하게 된 뒤로 그는 틈만 나면 <악학궤범>을 들여다본다. 1493년 조선 성종 때 예부터 전해내려오던 의궤(儀軌·조선시대에 왕실이나 국가의 주요 행사의 내용을 정리한 기록)와 악보를 정리한 <악학궤범>은 ‘국악의 바이블’ 같은 책이다. 1979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악학궤범>을 간행했고, 그 이후 국립국악원에서 이를 보완한 <신역 악학궤범>을 냈는데, 이 당시 그는 국립국악원에서 국악학자인 고 이해구 박사를 도와 교정작업을 했다. 그는 “그 일은 운명이고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에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문화원형콘텐츠사업을 하면서 연구자로 저를 지명했습니다. 제가 <신역 악학궤범> 교정작업을 했다는 것을 누군가 알고 추천한 거죠. 1년여간 문화원형콘텐츠 작업을 하면서 국악이론의 새로운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가야금의 형태는 <악학궤범> 권 7에 있습니다. 또 가야금 연주자가 입는 복식의 형태와 색깔은 권 9에 있고 앉아 있는 위치는 권 2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것을 다 모아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작업을 하면서 지식이 확 늘었어요.” 그는 “그 작업을 하면서 방대한 <악학궤범>의 지식을 자기화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당시 시간에 쫓겨 미숙했던 것이 자꾸 마음에 걸려서 보완하고 세밀한 디테일을 찾아내는 작업을 10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학궤범>을 책으로 새롭게 펴내는 것은 그에게 평생의 꿈이 됐다. “저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재미를 못 느끼지만 이 일만은 고달프더라도 재미가 있어요. 정직하니까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것 같아요. 사람도 공을 들이면 될 텐데 제 성격 탓인지 아직 결혼할 의욕은 생기지 않아요. 다 사주팔자인가 봐요.” 남원/정상영 선임기자 ch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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