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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숭배한 바그너 며느리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의 한국 초연을 앞두고 클래식계의 바그너 열풍이 뜨거워지고 있다. 실상 바그너의 음악은 듣기 쉬운 작품들은 아니다. 음악적인 난해함은 그렇다치고 나흘 간에 걸쳐 인터미션을 빼고 총 16~17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 자체가 정상인들로서는 감당하기 버거운 대상이다. 그래서 클래식 애호가 가운데에서도 바그너를 특별히 좋아하는 이들은 따로이 구분된다. 그들은 흔히 <바그네리안>이라 불린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일반적인 내공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버거운 <니벨룽의 반지>를 비롯해 자신만의 작품을 공연하기 위해 바그너는 극장을 바이로이트에 따로 세웠다. 1876년 준공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개막 기념작은 역시 <니벨룽의 반지>였으며, 바그너 사후 이 극장을 중심으로 바이로이트는 그의 직계자손들에 의하여 바그너 숭배자들의 순례지이자 메카로 자리매김했다. 대가 끊어지거나 소식을 알 수 없는 역대 음악가들과 달리 가문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는 바그너 가계는 매해 여름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개최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전세계에 인식시키고 있다.
이런 바그너 가계에도 정치적인 약점이 있으니, 그것은 히틀러와의 친분설이다. 히틀러는 젊은 시절부터 열렬한 바그너 숭배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당시 배낭에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악보를 넣어가지고 다녔다. 일부 바그네리안들은 단지 이런 히틀러가 바그너를 이용했을 뿐이라고 바그너를 옹호하고 있지만 1850년 <음악에 있어서의 유대성>이라는 논문에서 이미 바그너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임을 제창하고 있다.
하지만 1883년 사망한 바그너가 히틀러와 직접적인 친분을 맺을 수는 없었다. ‘바그너=나치’라는 공식을 성립시킨 인물은 바그너의 영국인 며느리, 위니프레드이다. 1930년 남편 지그프리트 사망뒤, 남편의 누이들을 제치고 바이로이트의 대권을 장악했던 그는 노골적인 나치주의자였으며 히틀러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손자 고트프리트 바그너가 쓴 저서에는 그의 이러한 행각이 신랄하게 드러나 있다. 고트프리트는 “할머니는 1920년대부터 히틀러를 숭배했으며, 옥중의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쓸 원고지를 제공한 것도 할머니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또한 생전에 바이로이트에 방문한 히틀러가 위니프레드의 어린 두 아들, 현 바이로이트의 실제적 권력자인 볼프강과 빌란트(1966년 사망)와 함께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흑백 사진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현 세대들의 정치색까지 눈총을 받게 되었다.
제2차 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은 위니프레드를 나치의 주요 협력자 중 한 명으로 지정하고 바이로이트 축제에서의 일체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로 인하여 두 아들 빌란트와 볼프강이 축제의 운영권을 상속받았다. 아들들의 계승으로 인하여 바이로이트 축제는 정치적으로나 예술적으로 혁신적인 변화를 맞이할 수 있었지만, 위니프레드는 세상이 바뀌어서도 좀처럼 ‘나치’ 딱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장남 빌란트가 죽고 나서도 14년을 더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히틀러를 옹호하던 그는 1980년 사망한 뒤에도 바이로이트의 누가 되었다. 1997년 고트프리트의 저서로 인하여 코너에 몰린 바그너 재단은 예정되어 있었던 위니프레드의 탄생 1백주년 기념행사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인 상황으로 인해 바이로이트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감은 여전히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작품 연주가 여전히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이런 가운데 유대인을 차별하고 대대로 악연을 이어가고 있는 그 시발점, 바그너가 실은 유대인의 사생아 출신이라는 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노승림 공연 칼럼니스트/성남문화재단 홍보부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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