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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편곡 베끼기도 표절이다

등록 2014-03-10 19:18수정 2014-03-20 15:26

외고 l 영화 ‘수상한 그녀’ OST 표절 논란
얼마 전 영화 <수상한 그녀> 삽입곡 ‘한번 더’가 페퍼톤스의 ‘레디, 겟 셋, 고!’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수상한 그녀>의 음악감독 모그가 “두 노래는 명백히 다른 주선율을 가진 다른 곡”이라고 주장하자 페퍼톤스 소속사 안테나뮤직은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문화 비평 팟캐스트 ‘현대한국신화’를 운영하는 정진호씨가 이것이 ‘편곡 표절’이라는 문제 제기를 하는 글을 보내와 소개한다.

페퍼톤스 곡과 코드·악기 유사
작곡가 “멜로디 달라” 표절 부인

“작곡가들 ‘레퍼런스’라 부르며
노골적으로 편곡 베끼는데
멜로디 표절보다 파렴치해”

‘한번 더’가 ‘레디, 겟 셋, 고!’를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지만, ‘논란’이란 것은 두 곡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의 것이다.

우선 두 곡은 구성과 코드 진행이 매우 유사하다. (노래 전반부와 후렴을 이어주는) 브리지에서 전조(조바꿈)가 이뤄지며 전개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것과 구체적인 코드 배치가 우연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닮아 있다. 그간 편곡 표절의 사례를 보면 코드 진행은 원곡과 달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번 더’는 코드 진행마저 원곡의 것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았다. 같은 코드 위에서 표절 의혹을 피하기 위해 억지로 원곡과 다른 멜로디를 쓰려다 보니 어색한 멜로디 진행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 또 두 곡은 악기의 선택과 배치가 거의 동일하다. 인상적인 패턴의 드럼이 진행을 이끌고, 조금 높은 피치의 스트링이 곡에 색채를 더한다. 또 건반과 기타의 코드 연주 방식, 고음이 강조된 악기들의 톤 메이킹, 싱커페이션(당김음)을 활용한 섹션 등 많은 점이 비슷하다.

이처럼 ‘한번 더’는 명백히 ‘레디, 겟 셋, 고!’를 들으면서 옮겨 쓴 곡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번 더’의 작곡가 모그는 표절을 부인하고 있다. 편곡은 유사하지만 멜로디가 다르기 때문에 표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두 곡의 멜로디는 별개의 곡이라 봐도 무방한 수준으로 크게 다르다.

지금까지 법적으로 표절 여부를 따지는 과정에서 편곡보다는 멜로디의 유사성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대중 역시 곡을 음미하는 과정에서 편곡보다 멜로디에 관심을 갖는다. 이런 맥락에서 대다수 작곡가들은 편곡을 모방하는 것에 대해 당당한 입장을 견지해 왔다.

토이(유희열)의 ‘넌 어떠니?!’와 미국 밴드 토토의 ‘리아’가 대표적인 사례다. 두 곡 역시 악기의 선택과 톤 메이킹, 배치가 매우 유사하지만 멜로디는 서로 다르다. 그런데 이 곡은 표절 논란이 붙지 않았다. 심지어 유희열은 본인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에서 두 곡을 연이어 틀었다고 한다. 또 토토의 노래를 몹시 사랑해서 딸의 이름도 ‘리아’라 지었다고 한다. 즉, 작곡가는 원곡을 좋아하는 마음에 느낌이 비슷한 노래를 쓴 것으로 생각하며, 대중도 그 논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두 곡은 단순히 비슷한 느낌으로 쓰여진 곡이 아니다. 신스가 이끄는 도입, 동일한 패턴의 리듬, 아르페지오와 보조 선율을 담당하는 나일론 기타, 옅은 톤의 브라스 리드 등 많은 면에서 원곡의 작법을 하나씩 옮겨 삽입한 곡으로 보인다.

문제는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를 ‘편곡 표절’이라 부르지 않고 ‘레퍼런스’(참고)라 부른다는 것이다. 레퍼런스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대중의 안전한 공감대를 얻는 동시에 스스로도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좀더 엄밀하게 ‘편곡 표절’과 ‘레퍼런스’의 경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한때 서태지와 아이들의 ‘필승’과 미국 밴드 비스티 보이스의 ‘사보타주’ 사이에 표절 논란이 붙은 적이 있었다. 두 곡은 랩의 특징적인 톤과 리듬이 매우 유사하지만 곡의 구성이나 악기 배치는 상당부분 다르다. 이런 정도를 ‘재해석’ 혹은 ‘레퍼런스’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악기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옮겨 담은 곡들을 레퍼런스라 부를 수는 없다. 그것은 명백한 표절이다.

최근 방송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와 <불후의 명곡>이 인기를 얻으면서 ‘편곡 표절’이 크게 성행했다. 돈 스파이크, 황세준 등 다수의 유명 작곡가들이 방송에서 선보인 편곡 표절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돈 스파이크가 편곡한 바다의 ‘나의 옛날 이야기’는 비욘세의 ‘러브 온 탑’을 편곡은 물론 무대 연출, 의상까지 모두 베꼈다. 돈 스파이크와 바다는 다른 곡에서도 비욘세의 편곡과 콘셉트를 그대로 가져다 썼다.

‘편곡 표절’은 ‘멜로디 표절’에 비해 우연이 개입할 여지가 적다. 우연히 흥얼거린 멜로디가 과거의 어떤 곡과 유사할 순 있어도, 수많은 악기의 선택과 배치의 합이 특정한 곡과 거의 흡사하다면 그 의도성을 의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즉, ‘편곡 표절’은 ‘멜로디 표절’보다 훨씬 의도적인 표절이므로 더 비열하고, 파렴치한 것이다.

정진호/팟캐스트 ‘현대한국신화’ 운영자 www.facebook.com/ckmy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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