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크레디아 제공
리뷰 l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 독주회
티켓판매 1주 만에 전석 매진
무결점 기교·변화무쌍 표현
입체적 ‘스크랴빈’ 연주가 압권
공연 끝나도 관객들 못떠나
티켓판매 1주 만에 전석 매진
무결점 기교·변화무쌍 표현
입체적 ‘스크랴빈’ 연주가 압권
공연 끝나도 관객들 못떠나
5년을 기다린 만남이었다.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43)이 무대에 등장하기 전부터 공연장 안을 가득 채운 달뜬 분위기는 연주가 시작되자 숨소리까지 억누를 만큼 긴장된 몰입의 순간으로 치달았다. 그런데 5년 만에 만난 ‘연인’은 얼마나 황급히 떠나가는지. 2시간 짧은 만남이 끝나자 객석의 감정은 이별의 안타까움으로 변했다. 어떤 연인에 대한 감정이 이토록 격정적일까.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클래식계 슈퍼스타’ 예프게니 키신의 내한 독주회에서는, 연주회장 바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열띤 장면들이 연출됐다. 이날 2300여개의 객석을 꽉 채운 청중은 지난해 11월 티켓 판매 개시 1주일 만에 전석 매진으로 마감된 ‘예매 전쟁’의 승자들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한참 전부터 관객들은 넉 달 전에 예매해둔 티켓과 키신에게 사인 받기 위해 준비한 음반을 손에 들고 상기된 얼굴로 로비를 서성거렸다. 키신의 연주 장면을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망원경을 들고 온 사람도 눈에 띄었다.
연주회가 시작되자 객석의 집중력은 대단했다. 연주곡 해설 책자를 넘기는 소리, 옅은 기침 소리마저 눈총을 받을 정도였다. 상당수의 청중이 연주곡에 대해 사전 숙지해온 듯 악장과 악장 사이에, 혹은 곡의 여운이 사라지기 전에 성급하게 박수를 터뜨리는 일조차 없었다.
이번 내한 독주회의 프로그램은 1부 슈베르트, 2부 스크랴빈으로 구성됐다. 하이라이트는 단연 스크랴빈이었다. 섬세한 타건과 감각적인 페달 사용으로 독주회 때마다 마법 같은 음향을 선사했던 키신은 스크랴빈의 <피아노 소나타 2번>과 <12개의 연습곡>에서 허공 위에 ‘음향의 오로라’를 펼쳐냈다.
1부의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7번>에서 보여준 무결점 기교와 변화무쌍한 감정 표현이 과거 내한 공연에서 두드러졌던 비르투오소(기교가 매우 뛰어난 연주자)적인 면모의 연장선에 있다면, 2부 스크랴빈 작품의 연주는 국내 청중이 처음 접하는 신선한 청각적 충격이었다. 스크랴빈의 작품들에서 그는 음향만으로 원경과 후경의 입체감을 그려냈다. 그윽한 페달링으로 잔향을 허공에 띄운 뒤 정제된 타건으로 새로운 화음을 얹어냈다. 그 솜씨가 어찌나 기막힌지, 빠르게 진행하거나 음층이 두터운 부분에서도 결코 소리가 지저분하게 뒤섞이거나 뭉개지지 않았다. 수채화처럼 밑바탕의 색채와 덧칠한 색채가 각각의 투명함을 유지한 채 신비롭게 겹쳐졌다가 다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실연이 아닌 음반으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경이로운 ‘음향 샤워’였다.
키신이 마지막 곡을 끝낸 뒤 호흡을 고르자 객석에서는 함성과 함께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난 2009년 내한 공연에서 그는 열광적인 환호에 답해 1시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10곡의 ‘마라톤 앙코르’ 연주를 선사했지만, 이번에는 3곡의 앙코르 연주만을 들려준 뒤 애절하게 커튼콜 하는 청중을 뒤로하고 무대를 떠났다. 일부 청중은 예상보다 짧게 끝난 작별 의식에 아쉬움을 떨치지 못하고, 객석에서 한참 동안 박수를 보내며 그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그가 국내 청중에게만 인색한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니다. 그는 최근 미국 순회 독주회에서도 이번과 동일한 세 곡을 앙코르로 공연을 마무리했다. 공연 후 로비에서 열린 사인회의 대기줄은 음악당 로비 전체를 한 바퀴 빙 두를 정도로 길게 이어졌다. 사인회는 자정 무렵에야 마무리됐다. 김소민 객원기자 somparis@naver.com
사진 크레디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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