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내가 그에게 달라붙었습니까 아님 그가 나를 불러냈습니까”

등록 2014-04-08 19:28수정 2014-04-09 13:58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 연극 <메피스토>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 연극 <메피스토>
연극 ‘메피스토’
“대답해주십시오! 내가 그에게 달라붙었습니까, 아니면 그가 나를 불러냈습니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메피스토)는 자신이 파우스트를 유혹했다기보다, 파우스트가 먼저 자신을 불러냈다고 주장한다. “당신, 오늘 악마가 되리라!” 연극 전체를 관통하는 대사가 바로 이 한마디다. 16세기에 실존했다는 파우스트가 다시 무대로 불려나온 2014년. 이제 누구도 늙은 학자 파우스트처럼 신의 경지에 다가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연출가 서재형씨가 말했듯 지금은 파우스트의 시대가 아니라 자신이 먼저 악마가 되고 싶은 시대, 곧 악마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막을 올린 연극 <메피스토>(사진)는 괴테의 <파우스트> 원작과는 달리 메피스토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선과 악이 교차하는 인간의 이중성을 집요하게 캐묻는다. 파격적인 형식으로 사랑받았던 <왕세자 실종사건>의 서재형 연출, 한아름 작가 부부가 다시 호흡을 맞춰, 방대하고 난해한 고전을 현대에 걸맞은 110분짜리 연극으로 재탄생시켰다.

파우스트가 악마의 유혹에 넘어간 죄를 반성하면서 구원받는다는 원작과 달리, 연극은 ‘내면에 존재하는 악’이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인간은 악마가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는다고 하지만, 실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 영혼을 악마에게 바치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는 원작의 큰 줄기를 따른다. 평생 철학, 법학, 의학 등을 탐구한 파우스트 박사는 한계를 느끼고 세상을 등지려 한다. 이때 파우스트는 그의 영혼을 담보로 파우스트와 계약한다. 파우스트는 젊음을 되찾아 소녀 그레첸과 사랑을 하지만, 메피스토와 그의 악마성이 그레첸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몰아넣는다.

극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마녀 메피스토’의 탄생이다. 남성 캐릭터였던 메피스토 역을 여배우 전미도가 맡아 사악하고 매혹적인 ‘유혹의 아이콘’으로 거듭나게 했다. 메피스토 역은 왜 여성이 됐을까? 연출자 서재형씨는 “지금은 남성이 우월한 시대가 아닌 여성이 우월한 시대이기 때문에 여자를 캐스팅했다. 악이 여자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대에는 여자가 더 적절해서 여배우를 캐스팅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여배우가 맡은 메피스토는 늙음과 젊음, 여성성과 남성성이 교차하는 경계적이고 중성적 이미지로 표현됐다. 전미도는 끝이 갈라지는 거칠고 낮은 목소리를 내다가도 별안간 허공을 찢는 괴성을 내질렀다. 노파를 연상시키는 은회색 가발을 썼지만 눈꼬리는 젊은 여성처럼 붉은 색을 칠했다. 거기에다 남자처럼 검은 양복을 걸친 뒤 그 밑에 가장 여성적인 붉은 블라우스를 받쳐 입었다. 연극이 끝나자, 이 새롭고 매력적인 ‘마녀’의 탄생을 축하하는 우렁찬 박수가 쏟아졌다. 원숙한 연기를 선사한 파우스트역의 정동환에게도 환호가 이어졌다.

또 다른 인상적인 부분을 꼽으라면, 괴기스럽고 음울한 분위기의 무대디자인을 빼놓을 수 없다. 양쪽에 세워진 두 개의 검회색 건물은 파우스트가 끝내 닿을 수 없던 학문적 한계를 상징하는 책장이기도 하고, 결코 신의 경지를 넘을 수 없는 인간의 벽으로도 보인다. 건물 창문에 기대 무대 안을 기웃거리는 악마의 얼굴은 음산했고, 가끔 건물을 비추는 조명은 무덤 위를 춤추는 인광처럼 희번덕였다. 20여명 배우의 자로 잰듯한 군무와 악의 정령들의 합창도 극의 재미를 더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다. 원작의 난해함 때문에 오는 문제이겠지만, 자주 접하기 힘든 대사의 내용을 알아들으려 귀를 쫑긋 세울 때가 많았다. 19일까지. (02)580-1300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예술의전당 제공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