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음악감상실 하이마트에서 한국방송 클래식에프엠 ‘명연주 명음반’ 진행자 정만섭이 강연하고 있다. 하이마트 제공
[문화‘랑’] 문화공간, 그곳
(16) 대구 음악감상실 ‘하이마트’
(16) 대구 음악감상실 ‘하이마트’
고향은 어디 있을까. 유년의 언덕에 핀 아지랑이에도 있고, 어머니가 빚어주던 만두에도 들어 있다.
대구백화점에서 대구중앙도서관 쪽으로 200m쯤 가다 보면 왼쪽 건물 3층에 ‘하이마트’라는 간판이 나온다. 전자제품을 파는 곳 같지만, 절대 아니다. 독일어로 ‘고향’이라는 뜻의 하이마트(heimat). 서울에서 피란 온 1대 사장 김수억(1969년 작고)이 1957년 당시 대구극장 앞에 문을 연 전통음악 감상실이다. 고인의 손때가 묻은 에스피판과 엘피판들은 외동딸인 2대 사장 김순희(68)에 의해 더욱 반질반질하게 윤이 났다. 선곡표를 적은 칠판에는 로마자 손 글씨로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5번, 이자크 펄만,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라고 씌어있다. 3대 사장 오르가니스트 박수원(43)은 여전히 외할아버지가 쓰던 피셔 진공관 앰프에 전원을 넣고 턴테이블에 판을 얹는다.
한국전쟁 때 피란왔다 문 연 뒤
딸 이어 외손자까지 3대째 운영
초기에 썼던 진공관 앰프 지금도
강연에 동호회까지 ‘사랑방’ 구실 솜털 보송보송한 중학생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년까지 음악팬들에게 하이마트는 글자 그대로 ‘마음의 고향’이다. 1960년 밀양에 살던 중학 1학년 안경환(전 국가인권위원장)은 사촌들이 살던 대구의 음악감상실 하이마트에 자주 들렀다. 대학생이 돼서도 발길이 잦았다. 그는 17일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독일어 세대라 하이마트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한마디로 하이마트는 현대판 사랑방이요, 지성인의 광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1일 강연을 위해 대구를 들렀다가 추억이 어린 이곳을 찾아 두 곡을 신청했다.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와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1번. 1대 사장 김수억은 1950년 대구로 피란 왔다. 고인은 당시 중구 화전동 대구극장 앞 건물 2층에 50평 규모로 클래식감상실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애써 모은 레코드판이 깨질까 봐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전쟁 뒤 국도는 매우 덜컹거렸기 때문이다. 2대 사장 김순희는 대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함께 카탈로그를 보며 명반을 찾아냈다. 미국 있는 이모에게 부탁해 명반들을 한국에 들여왔다. 한꺼번에 10장 이상은 밀수라며 반입이 금지돼 10장씩만 들여왔다. 정성껏 모은 에스피판은 1970년 김수억 1주기 추모음악회 때 교회음악 작곡가인 나운영의 운경음악도서관에 대부분 기증했다. 참 묘하다. 1대, 2대, 3대 사장의 공통점은 ‘포기’다. 1대 사장이 레코드판이 깨질까 봐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포기했다면, 2대 사장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교사의 길을 포기했다. 김순희는 1969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보따리 다 싸놓았다. 하지만 그해 5월27일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아버지가 ‘나 없이도 잘해낼 수 있겠느냐’ 라고 물어 ‘감상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퇴원이나 하세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그게 유언이었다고 생각하니 교사 부임을 도저히 못 하겠더라.” 3대 사장 박수원은 음대 진학을 포기했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박수원은 중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친척의 권유로 음대를 포기했다. 그러다 결국 자기 꿈을 찾아 2000년 프랑스 리옹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한다. 4년간 오르간과 즉흥연주 과정을 졸업한 그는 2004~2006년 리옹 가톨릭대학교와 이릿니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즉흥연주 교수를 지냈다. 출강을 하면서 2년의 전문과정까지 수료한 그는 2006년 말에 귀국해 현재 연세대 외래교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가톨릭대, 성공회대, 계명대에 출강하고 있다. 그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활동과 함께 대구 ‘가톨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도 맡고 있다. 30~40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고령 성요셉재활원,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재능기부 활동도 한다.
하이마트는 지금도 문화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지난 10일 한국방송 클래식 에프엠 실황음악 진행자 정준호가 이곳에서 ‘현대음악의 차르, 스트라빈스키의 삶과 음악’을 강연했다. 에프엠 진행자로 유명한 <명연주 명음반>의 정만섭, <에프엠 가정음악>의 장일범 등도 강연한 바 있다. 이 행사는 음악감상모임 ‘클래식 아카데미’(회장 김현철 계명의대 명예교수) 주최로 열렸다. 다음 행사는 7월5일 ‘젬스 싱어스’ 연주회다. 격주로 화요일마다 ‘마음회’도 열린다. 음악과 예술사를 얘기하는 자리다. 중고등학교 음악감상반들도 한 달에 한번쯤 동아리 시간에 찾는다.
화요일인 17일, 마침 동호회 모임이 없어 한산했다. 하지만 탁상달력에는 방문예정자 메모가 빼곡하다. 18일 오후 1시 청구중 8명, 19일 오후 2시 경신중 48명, 20일 오후 4시 ‘마산 가곡모임’ 60명과 시간표시 없이 회암아동문학회 방문. 좌석은 70석으로 입장료는 학생 5000원, 일반 8000원이다.
대구의 클래식감상실 하면 하이마트와 함께 ‘녹향’이 떠오른다. 시인 양명문이 가곡‘명태’의 시를 쓴 곳. 1946년 문을 연 녹향은 국내 최초 전통음악 감상실이었다. 지난 2011년 작고한 설립자 이창수는 생전에 “서울에서 피난 온 예술가들이 다 이곳에 모였다. 그땐 정말 대단했다”고 회상한 바 있다. 녹향은 1980년대 이후 찾는 발길이 줄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다행히 대구시와 대구중구청의 지원으로 올 하반기 향촌문화관 지하 1층에서 재개관할 예정이다. 아들 이정춘(66)은 “새로운 공간에서 고전음악 사랑방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밝혔다. 대구의 음악팬들은 하이마트와 녹향이 함께 ‘문화사랑방’ 역할을 오래토록 지속하기를 바란다.
대구/글·사진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딸 이어 외손자까지 3대째 운영
초기에 썼던 진공관 앰프 지금도
강연에 동호회까지 ‘사랑방’ 구실 솜털 보송보송한 중학생에서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년까지 음악팬들에게 하이마트는 글자 그대로 ‘마음의 고향’이다. 1960년 밀양에 살던 중학 1학년 안경환(전 국가인권위원장)은 사촌들이 살던 대구의 음악감상실 하이마트에 자주 들렀다. 대학생이 돼서도 발길이 잦았다. 그는 17일 전화통화에서 “우리는 독일어 세대라 하이마트가 주는 느낌이 좋았다. 한마디로 하이마트는 현대판 사랑방이요, 지성인의 광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달 1일 강연을 위해 대구를 들렀다가 추억이 어린 이곳을 찾아 두 곡을 신청했다. 슈베르트의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와 모차르트 호른 협주곡 1번. 1대 사장 김수억은 1950년 대구로 피란 왔다. 고인은 당시 중구 화전동 대구극장 앞 건물 2층에 50평 규모로 클래식감상실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애써 모은 레코드판이 깨질까 봐 서울로 되돌아가는 것을 포기했다. 전쟁 뒤 국도는 매우 덜컹거렸기 때문이다. 2대 사장 김순희는 대학교 다닐 때 아버지와 함께 카탈로그를 보며 명반을 찾아냈다. 미국 있는 이모에게 부탁해 명반들을 한국에 들여왔다. 한꺼번에 10장 이상은 밀수라며 반입이 금지돼 10장씩만 들여왔다. 정성껏 모은 에스피판은 1970년 김수억 1주기 추모음악회 때 교회음악 작곡가인 나운영의 운경음악도서관에 대부분 기증했다. 참 묘하다. 1대, 2대, 3대 사장의 공통점은 ‘포기’다. 1대 사장이 레코드판이 깨질까 봐 서울로 돌아가는 길을 포기했다면, 2대 사장은 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교사의 길을 포기했다. 김순희는 1969년 2월 대학을 졸업하고 중학교 영어교사로 발령을 받아 보따리 다 싸놓았다. 하지만 그해 5월27일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아버지가 ‘나 없이도 잘해낼 수 있겠느냐’ 라고 물어 ‘감상실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얼른 퇴원이나 하세요”라고 큰소리를 쳤다. 그리고 돌아가셔서 그게 유언이었다고 생각하니 교사 부임을 도저히 못 하겠더라.” 3대 사장 박수원은 음대 진학을 포기했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쳤던 박수원은 중학교 때 전국대회에서 입상할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하지만 “엄마를 도와야 한다”는 친척의 권유로 음대를 포기했다. 그러다 결국 자기 꿈을 찾아 2000년 프랑스 리옹 국립고등음악원에 입학한다. 4년간 오르간과 즉흥연주 과정을 졸업한 그는 2004~2006년 리옹 가톨릭대학교와 이릿니 음악원에서 오르간과 즉흥연주 교수를 지냈다. 출강을 하면서 2년의 전문과정까지 수료한 그는 2006년 말에 귀국해 현재 연세대 외래교수로, 한국예술종합학교, 가톨릭대, 성공회대, 계명대에 출강하고 있다. 그는 파이프 오르간 연주활동과 함께 대구 ‘가톨릭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단장도 맡고 있다. 30~40명으로 구성된 이 오케스트라는 고령 성요셉재활원, 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재능기부 활동도 한다.
수만장의 음반이 소장된 뮤직박스에는 1대 사장 김수억의 초상화와 그의 손때가 묻은 진공관 앰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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