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왼쪽) 통일문제연구소 소장과 승무 인간문화재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가 17일 오후 서울 명륜동 노나메기 통일문제연구소에서 달력을 보며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문화‘랑’] 26년만에 보는 ‘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박종철, 이한열, 그리고 6월항쟁과 대선…. 이애주의 춤은 1987년 뜨거운 현장마다 있었다. 그의 춤사위에 백기완 선생이 글을 붙였던 1988년도 달력은 그 존재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었다. 26년 만에 찾은 달력과 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무려 26년 만이었다. 다락방 구석 책더미 속에 묻힌 채 쥐똥과 고양이 오줌이나 받아 내던 달력이 다시 햇빛 아래로 나온 것은. 사반세기 넘도록 까맣게 잊힌 채 버려졌던 ‘그 책’이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낸 까닭은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일 거라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헤아렸다. ‘이애주 한판춤 그림책’. 달력이자 책이요, 저 1987년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애주의 춤사위를 담은 사진집이기도 한 이 인쇄물의 이름이다. 1988년 열두달마다 이애주 교수의 춤 사진 한장씩을 싣고 그 아래에는 백 소장이 쓴 글을 곁들였다.
통일문제연구소 운영에 쓰일 기금 마련을 위해 1000부 남짓 찍었다. 백기완 소장과 이애주 교수가 서울 미도파백화점 앞에서 직접 판매에 나섰지만 그다지 많은 돈이 되진 못했다. 민주화 진영이 두 김씨의 단일화 실패로 87년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면서 이런 달력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흐릿하게 지워졌다. 얼마 전 춤 평론가 채희완 부산대 교수로부터 “그런 게 있었는데…”라는 말을 듣고서야 생각이 나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갖고 있다는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민주화 열기 절정 이르렀던 그때
월별로 춤 사진에 백기완 글 붙여
박종철 물고문, 이한열 장례식 등
당시 시대상황 표현해낸 몸짓들
“이건 예술 아닌 역사 이끄는 힘”
지금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난 건
“유신 잔재 끝내라는 뜻” 아닐까 지난 12일 오후였다. 장마를 앞두고 낡은 다락을 손보느라 쌓여 있던 책더미를 들어내던 중에 이 달력 책이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얼룩을 닦아 낸 다음 한장 한장 들춰 보자니 87년 당시의 뜨거운 열기와 감동이 다시금 밀려오는 듯했다. 그 열기와 감동을 나누고자 백기완 소장은 17일 오후 주인공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를 연구소로 불렀다. “며칠 전에 우리 집 창고를 뒤지다가 이걸 발견했어. 딱 보자마자, 내가 여려서 그런지, 내 방에서 나 혼자 줄줄줄 울었어. 그러면서 ‘아, 내가 이런 춤을 볼 때도 있었구나’ 혼잣말을 했다구.” 백 소장이 가리키는 3월치 달력 사진은 무명 한복 차림인 이 교수가 두 손을 등뒤로 한 채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담았다. 그 아래엔 백 소장이 쓴 춤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졌다. “이 그림은 강요된 죽음을 뿌리쳐 실날같은 목숨을 찾아 몸부림치는, 일어나는 우리춤의 가장 전형적 모습이다.” 달력을 보고 있던 이 교수가 설명을 보탠다. “이건 박종철 물고문 사건을 형상화한, ‘바람맞이’ 중 물춤 장면이에요. 두 손이 묶인 채 물로 들어갔다가 뿌리치고, 다시 물로 들어갔다가는 뿌리치고 하는 모습이죠.”
이어서 5월치. 최루탄에 맞아 숨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장례식장에서 춘 춤을 두고 백 소장은 “그 시대 민중의 요구를 온몸으로 빚어낸, 몸으로 쓴 예술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사진 아래 쓰였기를, “저 기가 막힌 울부짖음을 보라. 여기서 우리는 춤이란 한낱 표현예술이 아니라 역사를 이끄는 힘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고 되어 있다.
6월치엔 연세대 정문 앞, 이한열이 쓰러진 자리에서 베를 가르며 나아가는 모습이 담겼다. 이 교수가 당시를 회상한다. “베를 가르며 나오다가 한열이가 쓰러진 것처럼 나도 쓰러졌어요. 기절할 것 같았지요. 그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시장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이제는 일어나야지’ 하며 저를 일으켜 세우는 거예요. 한열이 누나는 뒤에서 오열하고 있고. 이런 얘기는 오늘 처음 하는 것 같네요.”
7월의 병신춤이며 8월 칼춤, 9월의 총 든 항쟁춤을 거쳐 마침내 하늘과 땅을 열어젖히는 12월의 마무리 춤에 이르기까지 춤사위는 점점 농익어 가고 두 사람의 회고담도 무르익는다. 백 소장이 아퀴를 짓는다.
“이애주 교수의 춤은 역사의 현장을 몸으로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지만 오늘의 역사를 헤쳐 가는 ‘서덜’, 불꽃이기도 한 거야. 이한열 장례식장에 200만 조문객이 모인 뜻이 뭬였나? 유신잔당 척결 아니가서? 그런데 지금 우리 꼴을 보라구. 그 유신 잔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지 않나 말이야. 지금이라도 모두가 하나 돼서 유신 잔재를 끝장내자, 그게 이 그림책이 우리한테 하는 말이라구.”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
월별로 춤 사진에 백기완 글 붙여
박종철 물고문, 이한열 장례식 등
당시 시대상황 표현해낸 몸짓들
“이건 예술 아닌 역사 이끄는 힘”
지금 다시 우리들 앞에 나타난 건
“유신 잔재 끝내라는 뜻” 아닐까 지난 12일 오후였다. 장마를 앞두고 낡은 다락을 손보느라 쌓여 있던 책더미를 들어내던 중에 이 달력 책이 나왔다. 먼지를 털어내고 얼룩을 닦아 낸 다음 한장 한장 들춰 보자니 87년 당시의 뜨거운 열기와 감동이 다시금 밀려오는 듯했다. 그 열기와 감동을 나누고자 백기완 소장은 17일 오후 주인공인 이애주 서울대 명예교수를 연구소로 불렀다. “며칠 전에 우리 집 창고를 뒤지다가 이걸 발견했어. 딱 보자마자, 내가 여려서 그런지, 내 방에서 나 혼자 줄줄줄 울었어. 그러면서 ‘아, 내가 이런 춤을 볼 때도 있었구나’ 혼잣말을 했다구.” 백 소장이 가리키는 3월치 달력 사진은 무명 한복 차림인 이 교수가 두 손을 등뒤로 한 채 꿇었던 무릎을 일으켜 세우는 모습을 담았다. 그 아래엔 백 소장이 쓴 춤에 대한 ‘해설’이 곁들여졌다. “이 그림은 강요된 죽음을 뿌리쳐 실날같은 목숨을 찾아 몸부림치는, 일어나는 우리춤의 가장 전형적 모습이다.” 달력을 보고 있던 이 교수가 설명을 보탠다. “이건 박종철 물고문 사건을 형상화한, ‘바람맞이’ 중 물춤 장면이에요. 두 손이 묶인 채 물로 들어갔다가 뿌리치고, 다시 물로 들어갔다가는 뿌리치고 하는 모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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