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주씨의 이미지밭 연작인 <무제>(93년작)와 호박잎과 딸기를 형상화한 근작 <무제>(2005년작).
극사실주의적 기법서 모더니즘으로 ‘꽃’ 그림선 미니멀 추구
‘김홍주식 회화 다시보기’
표면의 섬세한 질감을 내비치는 꽃잎 그림으로 유명한 중견작가 김홍주씨는 미술판에서 회화를 가장 회화답게 그리는 작가로 성가를 쌓아왔다. 70년대부터 경대, 거울테, 창틀 등에다 극사실적인 자화상, 인물 이미지 등을 그리며 두각을 드러냈으며 80년대엔 일상 이미지들을 들판에 부려놓은 괴팍한 풍경그림과 털덩어리 같은 문자도를 내놓더니, 90년대 중반 이후엔 꽃잎의 핍진한 묘사에 매달려 왔다. 변모를 거듭한 그에게 회화라는 것은 그리는 이의 시선과 세밀한 붓질 그 자체인 것처럼 보인다.
16일부터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개막하는 김씨의 개인전 ‘이미지의 안과 밖’은 성실한 변모를 거듭했던 작가의 작업들이 어떠한 맥락 아래에 있는지를 부각시킨다. 외국 화가들만 초대했던 이 갤러리가 국내 회화작가로 처음 그를 초청했다는 것은 앞으로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김씨가 차지하게 될 비중을 은연중 암시하는 셈이기도 하다. 30여년 동안 전통적인 유화를 그려온 그는 일관되게 재현의 문제에 천착해 왔는데, 실재 사물과 재현된 이미지의 차이를 드러내고 주무르는 유희적 작업이 주류다. 들머리에 있는 93년작 <무제>는 그런 면에서 매우 상징적이다. 화폭에 프린트된 양옥, 건축물 등의 이미지와 인물 증명 사진의 조각들이 이미지의 밭을 만들고, 산맥과 호수, 강의 이미지로 위장한 채 그것을 지켜보는 작가의 자화상이 보인다. 이런 작업들은 매우 섬세한 세필로 잔디밭의 인간군상을 묘사하거나 모나리자,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산하의 풍경들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사물을 비판적 거리를 두고 성찰하고 묘사하는 모더니즘 미술가의 본령이 드러나는 그의 작업들은 족자의 한자글씨를 인분덩이나 털덩이처럼 흐릿하게 묘사하는 작업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그는 대형 상업화랑에서 전시를 시작한 90년대 후반 소재를 꽃으로 단순화시키고 꽃의 미니멀한 질감 묘사에 주력하면서 작업의 틀 자체를 뒤바꾸게 된다. 전시 중앙부와 후반부의 꽃과 과일 그림이 이런 화력을 드러내주는 것들이다. 특히 핑크방으로 불리우는 전시장 안쪽 소 전시장의 핑크 빛 꽃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전시장의 흰벽에 스멀스멀 녹아드는 듯한 덩어리 같은 형상으로 그의 작업이 재현의 문제를 떠나 추상화의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그 연장선상에서 전시장 끝부분에 내걸린 가지, 딸기, 오동잎, 나팔꽃 등의 대형 근작들은 멀리서는 과일, 꽃의 형태를 띠지만 가까이서 보면 이미지가 사라지고, 단색의 색채추상 그림으로 변해버린다. 더 나아가 그는 80~90년대 밭 풍경 작업을 밭고랑, 언덕 등의 세밀한 질감 디테일만 살려 해체하는 근작들도 선보이고 있는데, 60줄을 넘어선 그의 작업들이 앞으로 흘러갈 방향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90년대 초반까지 시도했던 재현에 딴죽을 거는 표현 방식 실험을 거의 접고, 그는 이제 미니멀이나 단색조 그림에 가까운 감각적 표현의 경지를 추구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꽃 그림 작가로의 통속적인 변신이 후학과 평단의 곱지않은 시선을 낳았지만, 서구 작가들과도 다른 독창적인 작업논리로 변신을 택했다는 점에서 이번 전시는 곱씹을 대목이 적지않다. 미니멀 유행을 추구해온 삼성가 컬렉션의 전시장에서 그의 미니멀한 작업들은 이전의 전시들과 다른 맥락에서 빛나고 있다. 10월30일까지. (02)2259-7781.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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