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림박물관 전시장의 현대 추상회화를 방불케 하는 철화백자항아리들. 도판 호림미술관 제공
전쟁에 찌든 17세기 철사 안료
울긋불긋 발색·분방한 문양 매력
호림 ‘백자호’전서 청화와 함께 선
울긋불긋 발색·분방한 문양 매력
호림 ‘백자호’전서 청화와 함께 선
순백의 항아리, 그 곡면 위에서 울긋불긋한 선들이 요동치며 파격을 부린다. 용수철처럼 선은 튕겨오르고, 빙글빙글 돌아간다. 뎅강뎅강 끊기거나 자잘한 잔선이 찍히기도 한다. 낙서가 될 것 같은데, 어느새 왕방울 눈을 곧추세우고 꽈배기처럼 비늘몸을 비틀며 꿈틀거리는 용이 되었다. 격렬한 선묘만이 전부일까. 한점 한점 조심조심 찍고 스스슥 그은 흔적을 따라가니 어느새 소담한 꽃망울, 꽃무리로 변신하는 조화를 부린다.
이 분방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조선초 혜성처럼 명멸했던 분청사기인가. 아니다. 옛 도자기에서 파격의 멋하면 우리는 오직 분청사기라고 넘겨 짚는다. 착각이다. 미니멀이나 추상표현주의 못지않은 현대미술의 씨앗이 17세기 조선도공이 빚은 철화백자항아리에 묻혀있다. 현대회화 전시장이 300년전 과거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들게한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 호림박물관 분관의 기획특별전 ‘백자호 Ⅱ-순백에 선을 더하다’는 철화백자의 문양들이 관객을 한방 먹이는 전시다. 몰랐던 철화백자의 재발견이다.
철화백자는 전쟁과 가난에 찌들린 도자기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고 나라의 경제가 말이 아니게 피폐했던 시절에 나왔다. 전쟁 전 쓰던 고급안료 회회청(코발트블루)을 구하지 못하자, 대용으로 썼던 것이 철 성분을 지닌 철사 안료였다. 불순물이 많고 순도가 좋지못한 철이 불과 만나 일궈내는 울긋불긋한 발색의 편차가 철화백자 비장의 아름다움이 되었다. 안료 속 철 함유량과 굽는 온도가 들쭉날쭉해 황색, 적갈색, 흑갈색, 흑색 등 발색이 오묘하게 나타났다. 16세기만 해도 나라의 최고 화가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분원에 파견돼 청화백자의 문양을 그렸지만, 이 시기는 그럴 형편도 못됐다. 도공들이 과거의 문양을 본보기삼아 알아서 대충 그렸다. 그런데 그 울림이 분청사기 못지않다. 3층의 3전시장 ‘철화’에 나온 백자철화구름용무늬항아리의 용들은 왕방울 눈과 거대한 머리 등 기괴한 생김새에다, 비늘덮힌 몸의 생동감이 눈을 울렁거리게 한다. 백자철화국화무늬항아리는 조선 전기 순백자나 청화백자처럼 엄정한 짜임새가 아니다. 하지만, 붓으로 쓱쓱 쳐버린 듯한 네 개의 줄기와 그 줄기 끝마다 달린 소담한 꽃잎 무늬들이 마음을 뒤흔든다. 이 단순 솔직한 모양새는 그 엄혹한 시절을 버텨나갔던 조선 사람들의 순정한 마음의 표상이리라.
‘백자호’ 전은 도자기 컬렉션으로 이름높은 호림박물관이 조선 백자 항아리를 집중조명하기 위해 꾸렸다. 지난 봄 순백자항아리와 곧추선 형태의 입호(선 항아리)를 조명해 호평받았던 1부에 이어 2부는 청화, 철화백자 명품 컬렉션이 거의 모두 나왔다. 조선 백자항아리의 단아한 형태미와 청화, 철화로 그려진 다채로운 문양의 시기별 변천과정을 볼 수 있도록 1~3전시장을 꾸몄다. 국보, 보물도 꽤 있고, 거의 모두 수작들이다. 무엇보다,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었던 철화백자 명품들이 무더기로 쏟아내는 문양의 현대적 미감과 파격성이 기품있는 청화백자 명품들을 덮어버릴 만큼 강렬하다. 청화백자 전시는 구성이 깔끔하다. 16세기 도화서 화원들이 격조높게 그림을 그려넣은 초기 항아리들과 민화적 도상으로 바뀌어가는 18~19세기 분방한 무늬의 항아리들을 김홍도, 최북, 유덕장 등의 명품 그림과 견주며 감상할 수 있다. 1전시장에서는 청화백자, 철화백자, 그리고 순백자를 한공간에서 함께 보며 차이를 음미하도록 해놓은 점이 눈에 띈다. (02)541-3523.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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