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판 제공 자하미술관
강용면 작가 ‘현기증’
갑자기 시커멓고 울퉁불퉁한 벽이 눈앞에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1만명 가까운 사람들 얼굴상을 쌓아올린 것이었다. 높이 2m, 길이 15m를 넘는다. 각양각색 생김새, 질감을 지닌 얼굴들이 다닥다닥 제 생긴대로 붙어서 울룩불룩한 표면을 빚어냈다.
고은 시인의 연작시 <만인보>에서 영감을 얻은 작가 강용면씨가 합성수지로 빚어낸 대작 ‘현기증’은 그 스스로 세상이고 역사임을 은유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이 나온 그의 개인전 전시장(자하미술관)은 서울 북악산 자락 아래 부암동 골목길을 허위허위 올라가야 나온다. 전시장 1층에 숨을 헐떡이며 들어오면 바로 맞닥뜨리면서 올려다보게 되는 작품이 바로 ‘현기증’이다.
‘현기증’이 지닌 기념비적인 압도감은 규모 뿐만 아니라 9000여명의 얼굴들 각각에 실린 의미의 무게감에서 나오는 듯하다. 발랄한 아가씨의 얼굴부터 파일럿, 사이보그, 의사 안중근, 60년대 촌로같은 할아버지, 중생을 수호하는 신장상, 표정없고 선만 있는 얼굴들…주인공들은 각기 다른 시대, 다른 차원으로부터 왔다. 각기 다른 정체성과 욕망을 지녔던, 혹은 지니고 있는 장삼이사들이자 위인들이다.
역사가 거대한 책이라면, 사람들은 책을 메우는 텍스트를 이룬다. 그들은 역사의 활자다. 마치 거대한 인쇄활판 같은 이미지로 다가오는 강용면씨의 작업은 이 인간의 활자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재현하고 이들을 문장으로 꿰어 엮는 일이다. 이땅에서 희박해져가는 역사성와 공동체성의 우람한 실체를 눈으로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다. ‘현기증’의 얼굴들 색깔이 하나같이 시커먼 모노톤인 것도 역사의 엄중함, 공동체의 소중함에 대한 작가적 확신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따지고보면 ‘온고지신’연작으로 대변되는 20년 넘는 그의 조각 여정은 오방색 입히고 민화풍으로 깎은 군상조각 등을 통해 역사 속에서 인간과 공동체란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조각이 장식품과 부속품으로 변해버린 세태에서 의미를 보고 만지고 상상할 수 있게 하려는 작가의 분투기는 지금도 계속 쓰여지는 중이다. 27일까지. (02)395-3222.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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