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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활력 틔운 고려인의 땅서 삶의 밑동들을 담아내다

등록 2014-08-21 20:25수정 2014-08-21 21:01

다큐사진가 한금선씨가 류가헌갤러리 전시창에 내걸린 자신의 뽕나무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피사체에 감성적으로 몰입하며 사진을 찍는다는 작가는 “사진의 객관성은 몰입을 통한 깊은 이해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다큐사진가 한금선씨가 류가헌갤러리 전시창에 내걸린 자신의 뽕나무 사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피사체에 감성적으로 몰입하며 사진을 찍는다는 작가는 “사진의 객관성은 몰입을 통한 깊은 이해가 먼저 있어야 가능한 것”이라고 잘라말했다.
한금선 작가, 우즈베크 고려인 사진전
고려인 구술사 정리 작업에 참여
“이주 견디며 괜찮다던 어르신들
자존감 넘치는 삶에 신비한 경험”
참상 대신 세간살이·음식·밭 담아
그가 찍은 사진 속에 큰가지가 뭉텅 잘린 뽕나무 한그루가 서 있었다. 새로 난 잔 가지를 버들가지처럼 흩날리며 땅위에 뿌리박고 선 뽕나무 둥치, 그 자태가 당당하고 단단하다. 사진가 한금선씨는 유난히 이 나무에 끌렸다고 털어놓았다. 그 옹골찬 모양새가 전국 곳곳 약자들의 농성 현장을 날마다 쫓아다니는 이 열혈사진가의 분신 같기도 했다.

“번개와 우박 몰아치는 우즈베키스탄의 끝없는 목화밭 한켠에서 나무를 찍었어요. 어디든 잘 자라는 뽕나무야말로 생명의 힘 자체지요. 60여년 전 이산의 아픔을 안고 정착한 뒤에도 줄곧 삶의 주인으로 살아온 고려인 어르신들의 자화상이란 느낌이 들었지요. 흩날리는 새 가지들은 그들이 뿜어낸 삶의 기운 한 자락인 것 같기도 했어요.”

뽕나무는 우즈베키스탄에서 가장 흔한 나무다. 밭, 집 등의 경계를 짓는 데 쓰인다고도 했다. 한씨가 찍은 이 뽕나무 사진은 19일 개막한 개인전 ‘쩨르빼니-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31일까지)이 차려진 서울 통의동 류가헌갤러리의 들머리 전시창에 내걸렸다. 한옥 전시장에 들어가면 바람에 흔들리는 그곳 자작나무, 밀밭을 찍은 풍광도 보인다.

전시의 주인공은 당연히 우즈베키스탄 곳곳의 고려인 어르신들이다. 1937년 강제이주 정책으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카레이스키’ 역사는 익히 알려졌다. 제목의 ‘쩨르빼니’도 괜찮아란 뜻의 러시아말이다. 짐짝처럼 열차에 가족들이 던져진 뒤 병이나 굶주림으로 죽은 아이들을 밖으로 내던져야 했던 참상을 견디며 내뱉았던 말이다.

“지난해 5월 대구인문사회연구소와 고려인 구술사 정리를 위한 3주간 기행을 다녀온 결과물이죠. 순전히 재충전을 위해 응한건데, 제 인생 처음 신비스런 경험을 했어요. 상실의 비극을 겪은 그곳 어르신들이 뿜어내는 불가사의한 활력, 인간의 자존이 깃든 삶이었죠.”

전시에 고려인들 모습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어르신들과 함께 부대껴온 세간살이, 일상기물과 음식, 밭 등이 주로 등장한다. 아파트 뒤 텃밭을 일구는 할아버지의 곱게 닳은 쟁기, 소시지부터 상추쌈, 부추나물, 고봉밥 접시 등이 차려진 단오 잔치상, 알록달록 문양이 장식된 카펫벽…. 낡았지만 여전히 그들 삶과 마주하는 이 일상사물들의 풍경은 순식간에 집기와 세간을 바꾸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다. 안부마실을 다니며, 일주일 한번씩 모여서 춤추고 놀기도 하며, 간간이 러시아로 고분질(일년 몇개월을 타지로 떠나 농사짓고 수확해 돌아오는 것)갔다온다는 특유의 건강하게 발효된 삶들이 이 낡은 사물들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어르신과의 대화를 떠올리면서 이 물건들을 찍곤 했다는 작가가 사진 하나를 가리켰다. 옷장이 열리는 순간을 장노출로 찍은 것이었다.

“어느 분 구술을 받다가 쉬는 중에 거실 옷장이 열린 것을 봤어요. 모포가 삐져나왔는데, 안쪽벽에 티셔츠가 걸려있었어요. 눈물이 막 나오데요. 이주명령 받고 쫓겨난 집 안의 방치된 풍경 같은 느낌… 아, 여기선 사물 갖고 찍어야겠구나, 그때부터 작업이 풀렸어요.”

한 작가는 참상투성이 구술내용은 가슴에 묻고 어울려 사는 모습 자체를 주시했다고 한다. 잔치상에 가져올 게 없어 배급된 소시지를 들고온 김 나제즈다 할머니, 텃밭 푸성귀를 팔지않고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을 평생 업으로 삼고 살아온 림 리하르드 할아버지 이야기들이 오롯이 그들 음식과 농기구 사진으로 남았다. “어르신들은 강제이주 때 안은 상실의 기억을 새 삶의 터전으로 만들었어요. 상실을 생성으로 바꿔내는 삶, 험난한 기억들이 굳건한 삶의 의지와 공존하는 모습은 놀라움 자체였어요.”

불과 3주동안 찍은 사진들로 <째르빼-니>란 사진집(봄날의 책)까지 낸 것은 고려인 어르신들의 이 불가사의하면서도 편안한 힘을 두고두고 새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했다. 7월 밀양 송전탑 농성현장을 찍은 사진들을 동료들과 함께 전시했던 그는 고려인 어르신들이 준 활력을 떠올리며 지금도 곳곳의 농성현장을 누비고 다닌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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