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이중생 각하>의 한 장면.
리뷰 l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
오영진 65년전 작품 다시 무대에
친일파 사망 통해 인간 탐욕 그려
오영진 65년전 작품 다시 무대에
친일파 사망 통해 인간 탐욕 그려
“우선 ‘이중생 사망(사기)사건’에 대한 현장검증을 지켜볼까요? 대청마루엔 난과 백자가 놓여있군요. 고매한 선비 취향을 가진 듯 보이려고 꽤 애썼네요. 이곳에서 이중생은 면도칼로 목 동맥을 끊었습니다. 아, 실제로 죽은 건 아니고 자살한 척했지요. 그 다음 병풍 뒤에 누워 향 냄새를 맡으며 ‘살아있는 시체’로 문상객을 받습니다. 그럼 사랑방을 볼까요. 일본식 다다미가 깔려있군요. 제법 선비풍을 내려 했지만 뿌리깊은 친일파 취향은 숨길 수가 없었나 봅니다. “소생은 죽음으로써 개과천선을 하렵니다! ” 이 방에서 가짜 유서가 작성됩니다. 거짓 사망진단서도 마찬가지고요. 이번엔 뒤뜰로 갑니다. 벚꽃 엔딩. 벚꽃이 무심히 지고 있군요. 이중생이 진짜 생을 마감한 곳이 바로 여깁니다. 면도칼을 치켜 들었다 내려친 거죠.”
인용문은 ‘이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가상으로 꾸며 본 현장검증이다. 국립극단이 지난 12일 막 올린 <살아있는 이중생 각하>는 악질 친일파 이중생의 사망(사기)사건을 통해, 해방 직후 청산되지 못한 식민잔재와 함께 권모술수와 탐욕에 물든 인간군상을 세밀화로 그려낸다.
먼저 이중생. 일제강점기에 아들을 징용에 보내면서까지 부를 축적하고 해방 직후 국유림을 가로채려 무허가 산림회사를 차린다. 공무원과 미국인을 뇌물로 구워삶는 건 물론이다. 그러다 음모가 들통나 배임 횡령, 공문서위조, 탈세혐의로 구속되고 전재산이 몰수될 위기에 처한다. 이중생은 거짓 장례를 치른 뒤, 재산을 사위에게 넘겨 배후에서 관리하려고 한다. 하지만 사위는 무료병원 설립에 이 재산을 내놓겠다고 하면서 ‘사망사기’로 재산을 지키고 위기를 모면하려던 이중생의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된다. 제 꾀에 제가 속은 그는 죽음으로 내몰린다. 요즘에도 단골뉴스인 차명재산 얘기다. 다른 인물들도 그리 떳떳하지는 못하다. 동생에 빌붙어 재산에 혈안이 된 친형, 아버지한테 얹혀살면서 그의 재산을 노리는 큰딸, 아버지를 비난하지만 절연하지 못하는 막내딸, 이중생의 위장 죽음을 꾸민 탐욕의 화신인 변호사.
극작가 오영진(1916~1974)이 1949년 쓴 작품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은 2014년 오늘 우리 주위에도 넘쳐난다. 연극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연극 중 어떤 인물과 닮았느냐고.
10년 만에 징용에서 돌아온 중생의 아들은 탐욕과 거짓으로 점철된 한 시대의 종말을 선언한다. “아버지 세대는 이제 죽었다.” 하지만, 낡은 시대는 끝났지만 새로운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더구나 완전히 끝나지 않은 낡은 시대는 새로운 시대의 발목까지 잡고 있다. 오영진이 65년 전 쓴 작품을 김광보 연출이 다시 만들고, 국립극단이 마련한 ‘근대희곡의 재발견’의 첫 무대에 이 작품을 내세운 이유다. 청산하지 못한 1949년의 과거를 2014년 현재의 우리가 곱씹어 볼 기회다. 28일까지 서울 남산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1688-5966.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국립극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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