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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따로 또 같이 19년…‘펑크 꼬마’서 ‘홍대앞 큰형’으로

등록 2014-09-25 19:50수정 2014-09-26 10:29

국내 인디 1세대를 상징하는 펑크 밴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최근 합동 앨범 <96>을 발표했다. 이들은 1996년 서울 홍대앞 클럽 드럭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 한국 인디신을 따로 또 같이 이끌어왔다. 드럭레코드 제공
국내 인디 1세대를 상징하는 펑크 밴드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최근 합동 앨범 <96>을 발표했다. 이들은 1996년 서울 홍대앞 클럽 드럭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 한국 인디신을 따로 또 같이 이끌어왔다. 드럭레코드 제공
[문화‘랑’] 합동 앨범 낸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90년대 홍대앞 펑크바 드럭에서 알코올과 땀으로 밤을 적시며 노래하던 ‘꼬마들’은 이제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성장했다. 최근 합동 앨범 <96>을 낸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그들이 써온 19년 한국 펑크의 역사를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가 돌아본다.
지난 17일 저녁 서울 홍대앞 라이브클럽 디지비디(DGBD),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의 합동 앨범 <96> 발매 기념 이벤트가 열렸다. 그들이 처음 만난 1996년 이후 두 팀이 처음으로 같이 낸 앨범이다. 지난 4월 <교육방송> 음악 프로그램 <이비에스 스페이스 공감>에 함께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앨범 작업까지 이어졌다. <96>에서 크라잉넛은 노브레인의 노래를, 노브레인은 크라잉넛의 노래를 각자의 방식으로 재해석한다. 유일한 신곡인 ‘96’은 크라잉넛의 한경록이 만든 노래로, 바로 그 1996년을 음악에 담는다. 크라잉넛의 박윤식과 노브레인의 이성우가 주거니 받거니 부르면서 결국 모두의 합창으로 이어지는 순간엔 어떤 아련함이 밀려온다. 그들이 따로 또 같이 걸어온 19년의 소회가 눈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공연 시작 전, 객석 뒤 모니터에서는 그들의 미공개 90년대 영상이 흘렀다. 지방 공연, 뮤직비디오 촬영 같은 공식 행사부터 그들이 함께했던 라이브클럽 드럭에서의 시시껄렁한 잡담까지, 앳되고 푸르렀던 시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처음 공개되는 이 영상을 보며 그들은 말했다. “다들 완전 꼬마였네.” “저땐 연주 존나 못했구만.” 그랬다. 타임캡슐 같은 이 영상에서 그들은 그저 알코올로 밤을 적시고, 땀과 수증기로 좁디좁은 지하실을 채웠으며,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음악을 재미있게 하는 스무살 언저리의 풋사내일 뿐이었다. 약 20년 뒤 그 시절이 어떻게 평가받고 기억될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성긴 에너지들이었다.

라이브클럽 ‘드럭’서 함께 출발
‘아워 네이션’ 음반 시리즈로 인기
공연 펑크 낸 멤버 대신해주기도
럭스와 함께 ‘펑크 삼국지’ 이끌다
모던록, 댄스클럽 물결 속 한때 침체
정기공연, 해외투어 하며 다시 우뚝
“말 달리자, 넌 내게 반했어”

1996년 여름, 군복무 중 첫 정기휴가를 받아 드럭을 찾았다. 1994년 펑크바를 표방하며 문을 연 드럭은 이듬해 4월5일 드럭의 ‘죽돌이’들이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 사망 1주기를 맞아 연 추모공연을 시작으로 하나의 사건 같은 공간이 됐다. 헤비메탈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음악팬들이 동시대 음악을 좇아 드럭으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꽤 오랜만에 다시 찾은 드럭은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현관에서 내려가는 계단은 그라피티로 도배되어 있었다. 노랗고 파랗게 물들인 머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허리춤에 체인을 매단 사람들이 계단에 앉아 “씨발”, “존나”를 남발하며 대화하고 있었다. 외국 음악잡지에서나 보던 펑크족들이 드디어 한국에 나타난 것이다. 중학교 때 ‘삥’을 뜯던 일진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무서웠다. 한국 사회에 운석처럼 떨어진 이 펑크족들을 보는 일반적 시선이 다를 리 없었다. 그들은 수시로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해야 했고, 술 취한 아저씨들의 시빗거리가 되어야 했다. 노브레인, 크라잉넛을 비롯한 초기 펑크 밴드들의 노래는 그래서 극도로 공격적이다. ‘말 달리자’처럼 말이다.

적대하는 세력이 있으면 열광하는 세력 또한 있는 법.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이 비주얼과 음악은 추종세력 또한 끌어모았다. 일종의 전속 밴드 개념으로 운영되던 초기 홍대앞 라이브클럽의 중심은 드럭이었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 싱어송라이터 이지형이 몸담았던 위퍼는 90년대 중후반 드럭을 대표하는 밴드이자 홍대앞에서 가장 많은 팬을 몰고 다니는 밴드이기도 했다. 100명 남짓 들면 꽉 차는 공간에 150명, 아니 200명이 들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주말에만 열리던 공연은 금요일, 그리고 목요일까지 확장됐다. 그래도 늘 사람들이 많았다. 좁은 공간에서 슬램과 모싱, 스테이지 다이빙을 하는 관객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는 수증기가 되어 천연 스모그 효과를 내곤 했다.

‘인디’라는 말이 일간지 문화면의 가장 ‘핫’한 열쇳말이었던 시절, 펑크는 인디의 대주주에 다름 아니었다. ‘말 달리자’가 처음 수록된, 크라잉넛과 옐로우키친이 참여한 드럭 시리즈 앨범 <아워 네이션>(1996)은 그 뜨거웠던 지하의 에너지가 세상에 미디어의 형태로 분출되는 순간이었다. 홍대앞 어딜 가든 ‘말 달리자’를 들을 수 있었다. 전국 노래방 히트곡이 되기 몇 년 전, ‘말 달리자’는 이미 한 지역과 문화를 상징하는 노래였다.

그들이 홍대앞을 뚫고 세상 밖으로 달리기 시작한 건 1997년 말부터였다. 본격적으로 흥겨운 스카펑크를 도입한 노브레인은 위퍼와 함께 드럭의 두번째 시리즈 앨범 <아워 네이션 2>를 냈고 ‘바다 사나이’를 히트시켰다. 이 노래는 키치스러운 뮤직비디오에 힘입어 인디 최초로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텐>에 진입했다. 1998년 초 크라잉넛 1집이 발매됐다. 좀더 깔끔하게 다시 녹음된 ‘말 달리자’ 역시 라디오에서 종종 흘렀다. 그해 8월15일 크라잉넛은 <문화방송>의 <음악캠프>에 출연했다. 핑클, 젝스키스 등과 함께 나간 크라잉넛의 백댄서는 노브레인을 비롯한 드럭의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동선’ 따위 없이 무대 위를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마지막에는 노브레인의 차승우가 크라잉넛 이상면 뒤에 서서 그의 기타를 대신 치는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다. 그런 마구잡이 멋진 쇼 무대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활동 초기 함께 찍은 사진. 드럭레코드 제공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활동 초기 함께 찍은 사진. 드럭레코드 제공
누가 공연을 ‘펑크’ 내면 같은 포지션의 멤버가 즉석에서 ‘땜빵’ 해줄 정도로 동고동락했던 그들은 곧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방송 출연이 많아지는 것에 대한 갈등으로 노브레인이 드럭을 떠난 것이다. 크라잉넛은 계속 드럭을 지켰다. 그들을 중심으로 이후 펑크신은 갈등 아닌 갈등 구도를 형성하게 됐다. 노브레인은 이후 자체 레이블 문화사기단을 세워 <청춘98> <청년폭도맹진가> 같은 명반을 쏟아냈다. 많게는 10여팀의 펑크 밴드들이 문화사기단에 합류해 하나의 세력을 형성했다. 드럭과 같은 아지트 공간이 없었던 그들은 밤마다 홍대앞 놀이터에 모여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나갔다. 크라잉넛은 여전히 드럭을 지키며 ‘서커스 매직 유랑단’, ‘밤이 깊었네’ 같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노브레인의 문화사기단, 크라잉넛의 드럭, 그리고 독자 노선을 추구하던 럭스의 스컹크가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펑크를 솥발처럼 받쳤다.

드럭에서 크라잉넛이 공연하는 모습. 드럭레코드 제공
드럭에서 크라잉넛이 공연하는 모습. 드럭레코드 제공
때로는 주변인들의 주먹다짐까지 가기도 했던 펑크 삼국지도 아주 오래간 건 아니었다. 2002년 차승우의 탈퇴로 노브레인은 슬럼프에 빠졌고, 문화사기단 역시 공중분해됐다. 크라잉넛 역시 2002년 12월 4명의 멤버가 동시에 입대하며 긴 공백을 가졌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이 함께 20대 초를 불태웠던 드럭은 2004년 초 디지비디라는 이름으로 다른 곳에 둥지를 틀었다. 그들이 일궜던 홍대앞의 주도권은 펑크에서 모던록으로 넘어갔고, 라이브클럽보다 댄스클럽에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90년대를 홍대앞에서 보낸 이들 대다수가 이곳을 떠났고 음악을 떠났다.

하지만 1996년의 펑크 꼬마들은 펑크를 넘어 홍대앞 전체의 큰형뻘이 됐다. 크라잉넛은 여전히 ‘너트 쇼’라는 이름의 정기공연을 홍대앞 라이브클럽에서 열고 있다. 초기의 갤럭시 익스프레스, 장기하와 얼굴들이 이 무대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노브레인은 정민준을 기타로 영입한 뒤 ‘넌 내게 반했어’를 히트시키며 그 이전보다 높은 상업적 지위에 올랐다. 지난해 했던 북미 투어 ‘서울소닉’에서 마돈나를 발굴한 세계적인 제작자 시모어 스타인이 이들의 공연에 반해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20세기 말의 퀴퀴한 지하실을 달궜던 아이들이 커서 페스티벌 헤드라이너급이 됐다. 그리고 19년 만에 다시 만났다. 같이, 또 따로 노래했던 길이 추억이 됐다. 다시 같이 노래하는 이 순간 또한 그럴 것이다. 크라잉넛과 노브레인은 여전히 여기 서 있다.

김작가/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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