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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수집가, ‘삼풍’에서 ‘세월호’를 채록하다

등록 2014-10-09 20:43수정 2014-10-14 11:04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는 삼풍백화점 사고(아픔), 2002년 한·일 월드컵(환희),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 일대(추억)의 기억을 수집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시민 개인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예술작품으로 다양하게 제작해 서울과 대한민국의 역사로 생생하게 복원하겠다는 계획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는 삼풍백화점 사고(아픔), 2002년 한·일 월드컵(환희),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 일대(추억)의 기억을 수집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은 시민 개인들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예술작품으로 다양하게 제작해 서울과 대한민국의 역사로 생생하게 복원하겠다는 계획이다. <한겨레> 자료사진
[문화‘랑’]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

기억수집가 박현숙씨가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 구조대원 김명완씨와 마주앉았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의 잘못은 되풀이된다. 502명의 목숨을 앗아간 삼풍의 악몽은 세월호로 이어진다. 서울문화재단의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 현장이다.
2014년 10월7일 오후 2시 서울 남산 아래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기억수집가’ 박현숙씨가 이곳은 찾은 이유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의 기억을 채록하기 위해서다. 녹음기를 든 박씨는 당시 도봉소방서 119구조대원 김명완(49)씨와 마주앉았다. 구조대원 김씨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끔찍한 과거 기억과 대면해야 했다. 사고 뒤 석달 동안 환청과 이명에 시달려야 했던 그해 초여름의 악몽. 김씨의 기억은 영화 <박하사탕>의 거꾸로 가는 기차처럼 서서히 뒷걸음질했다. 그리고 1995년 6월29일 딱 그날에 멈췄다.

그날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붕괴 20초 만에 지하 4층까지 무너졌다. 불법용도변경, 부실시공, 뇌물수수 등 온갖 불법과 비리가 난무한 결과였다.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낳았다.

기억의 기관차는 다시 19년 뒤인 올해로 돌아왔다. 2014년 4월16일 또다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꽃다운 아이들을 태운 세월호가 침몰한 것이다. 침몰참사보다 더 큰 참사는 구조시스템의 작동불능이었다. 기억하지 않는 과거는 되풀이된다. 박현숙씨와 같은 기억수집가들이 삼풍참사 관련자들의 기억을 모은다. 서울문화재단이 기획한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9·11과 후쿠시마 참사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당시 구조대원 김명완씨가 기억수집가에게 당시 상황을 구술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당시 구조대원 김명완씨가 기억수집가에게 당시 상황을 구술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삼풍 구조대원 “19년 되도록 배운 게 없다”

다시 구조대원 김명완씨가 맞닥뜨린 당시 참사현장으로 가보자.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1일째인 1995년 7월9일 오전 8시20분 김씨와 동료 구조대원은 콘크리트 더미 밑에서 당시 스무살이었던 최명석씨를 극적으로 구조했다. 구조반은 이날 오전 주검을 수습하기 위해 잔해 제거작업을 벌이던 중 “여기 사람 있어요”라는 목소리를 들었다. 김명완씨는 “처음엔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지하작업중인 구조대원의 소리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구조반은 오전 7시13분께 최씨 생존 사실을 대책본부에 보고한 뒤 산소절단기 등으로 얽혀 있는 철골 더미를 끊어내는 작업을 벌인 지 1시간여 만에 최씨를 구조했다. 최씨가 극적으로 구조된 곳은 무너져내린 지상 2층 콘크리트 상판이 에이치(H)빔 등에 의해 기적적으로 떠받쳐진 이른바 ‘생존 틈새’였다.

다시 2014년. 기억수집가들은 현재 건설회사에 다니는 생존자 최씨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그는 거절의 뜻을 밝혀왔다. 깊은 내상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이다. 기억수집가와 만나 19년 전 기억을 더듬던 김씨는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습니다. 사고가 나면 그때뿐이죠. 어릴 때부터 안전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지만, 우선 있는 법이라도 잘 지켜야 합니다. 재난관리법에 학교에 몇 명 이상 안전교육사를 두게 돼있는데 그게 법에만 있는 문구지 실제 운영이 안 되고 있어요.”

다양한 기억들 아카이브로 구축
삼풍백화점 사고 아픔 채록 작업
생존자·목격자·구조대 증언 수집
“사고 나면 그때뿐, 바뀐게 없어
상처 덧내는 것 같아 힘들지만
사회 전체 각성시키는 데 도움”

“참사재발 막고 미래세대와 기억 공유”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하지만 기억되지 않은 한 사람의 일생은 결코 어마어마한 일이 될 수 없다. 한 사람의 기억이 기록되고, 그런 기억이 모여 거대한 기억창고를 이룰 때, 그곳에서 비로소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나온다.

서울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 사업에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650명의 시민이 참여해 900여개의 에피소드를 모았다. 37명의 기억수집가는 개인의 기억이라는 사적 영역과 역사적 기록이라는 공적 영역을 이어주는 매개체다. 이들은 개인의 머릿속에 켜켜이 쌓인 기억의 지층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고고학은 오늘과 내일의 길을 밝혀주는 ‘고현학’과 ‘미래학’이 될 수 있다. 과거의 아픔을 채록하는 것은 현재의 아픔을 오래 기억하고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미래 세대와 공유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기억수집가 박현숙씨는 “지난해 수집한 기억들은 학창시절 추억을 비롯한 소소한 개인사였어요. 그런데 삼풍이라는 참사의 기억을 끄집어내려니, 악몽과 상처를 덧내는 것 같아 솔직히 힘들었어요. 하지만 개인의 기억능력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아픔에서 환희까지 동시대의 기억을 기록해 공유한다는 것은 사회 전체를 각성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봐요. 시민들이 많이 참여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했다.

현재까지 시민 650여명이 자신들의 기억을 구술해, 모두 900여개의 에피소드가 모였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현재까지 시민 650여명이 자신들의 기억을 구술해, 모두 900여개의 에피소드가 모였다. 서울문화재단 제공

수집된 기억은 다큐·예술작품 제작

올해 이 프로젝트는 세 가지 주제로 진행하고 있다.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시장 일대(추억), 2002년 한·일 월드컵(환희), 삼풍백화점 사고(아픔)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착수한 ‘메모리인 서울-삼풍백화점의 아픔’ 프로젝트는 지난 9월부터 기억수집가를 통해 생존자와 목격자, 구조대 등의 자료를 수집했다. 수집 자료를 보면, 377시간을 버틴 최후의 생존자 박승현씨를 비롯해 삼풍백화점부터 세월호까지 각종 재난사고에서 인명구조 활동에 앞장서 온 배우 정동남씨와 같은 미담뿐만 아니라 과도한 취재 경쟁으로 인한 후유증 등 어두운 단면도 드러났다.

삼풍백화점 사고와 관련된 기억을 가진 시민이라면 누구나 제보에 참여할 수 있다. 사고 현장에 있었거나, 부상을 입어 구조되거나 구조활동에 참여한 사람, 사고로 가까운 이를 잃은 사람, 취재나 조사, 소송에 관계한 사람 등 본인 경험이나 목격담을 직간접적으로 증언해줄 모든 시민들의 참여를 기다리고 있다. 제보된 시민들의 기억은 37명의 기억수집가들이 기록한다. 기록된 목소리들은 서울시청 서울도서관에 위치한 ‘메모리 스튜디오’ 청취 부스나 <메모리인(人)서울 프로젝트> 홈페이지에 저장해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또 기록은 다큐멘터리와 책 등 2차 문화 콘텐츠로 제작된다. 제보는 누리집(sfac.or.kr/memoryinseoul)으로 하면 된다. (02)3290-7123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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