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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그림 같은 글자가 툭툭 ‘추사체’

등록 2014-10-14 19:43

코끼리 모양을 본 뜬 옛 한자 원형을 그려넣어 추상화 같은 파격을 드러낸 추사의 글씨 ‘설암게’(간송미술관 소장). 60대 환갑 때 유배지 제주를 찾은 초의선사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된다.  간송미술관 제공
코끼리 모양을 본 뜬 옛 한자 원형을 그려넣어 추상화 같은 파격을 드러낸 추사의 글씨 ‘설암게’(간송미술관 소장). 60대 환갑 때 유배지 제주를 찾은 초의선사에게 써준 것으로 추정된다. 간송미술관 제공
한자 서예 5체를 맘껏 오가고
파격적인 김정희 대표작 전시
간송미술관 ‘추사정화’는 26일
불교박물관 특별전 12월까지
서릿발 같은 한자 글씨들 사이로 뼈대만 남은 코끼리가 뛰쳐나온다. 휙 말린 코와 세개의 다릿발, 길쭉한 꼬리. 코끼리 모양을 본떠 변형시킨 상(象)자의 원래 모양이다. 이 아득한 옛적 글자를 정갈한 행서체 문장 속에 암호처럼 던져버렸다. 문장의 뜻이 심오하다. ‘바다 밑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곤륜산에서 코끼리 타니 백로가 고삐를 끄는구나.’

19세기초 전남 해남 대흥사의 설암스님이 남긴 게송(깨달음을 담은 시) ‘설암게’를 대학자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이처럼 파격적인 추상화로 바꿔놓았다. 언제 봐도 새롭고, 날마다 새로와지며, 옛 법도를 바탕으로 새로와지는 것. 조선왕조가 쇠락해가던 19세기 문화판을 등불처럼 비추었던 추사는 법고창신(法古創新) 기치를 내걸고 글씨에서 당대 전위 예술을을 이끌었다. 옛 법도의 가장자리 경계에 추사는 항상 칼날처럼 서있었지만, 중심을 잃지않고 무한자유의 경지를 일궈냈다.

올해 가을은 추사 글씨를 아끼는 이들에게 행복한 시절이다. 추사체 경지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두 전시가 펼쳐지고 있다.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의 가을전시 ‘추사정화(秋史精華, 26일까지)’와 서울 견지동 불교중앙박물관의 특별전 ‘봉은사와 추사 김정희’(12월14일까지)다.

불교중앙박물관에 처음 선보인 추사의 현판 글씨들. 경북 영천 은해사의 `대웅전’ 현판과 `불광’ 편액이 보인다. ‘판전’과 함께 추사체 현판의 진수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노형석 기자
불교중앙박물관에 처음 선보인 추사의 현판 글씨들. 경북 영천 은해사의 `대웅전’ 현판과 `불광’ 편액이 보인다. ‘판전’과 함께 추사체 현판의 진수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노형석 기자
간송미술관 전시는 ‘설암게’를 포함한 추사의 노년작을 중심으로 거장의 글씨 40여점을 1층 공간에만 내보였다. 들머리에서 맨 처음 만나는 37세 때 작품인 행서 대련 ‘직성수구(直聲秀句)’부터 마지막에 만나는 추사 60대의 걸작 ‘계산무진(谿山無盡)’과 난초, 도인들 문인화들까지 중국 고금의 옛 비석과 글씨첩을 섭렵한 추사체 특장을 한달음에 보여준다. 다채로운 필법들이 종횡무진하는 여러 대련들과 ‘사야(史野)’‘명선(茗禪)’ 같은 큰 글씨들은 질리지 않는다. 괴이하면서도 발랄하고, 긴장감을 주면서도 유연하다.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의 한자 필체 5체를 내키는대로 오가며 구사하는 게 추사체의 특징이다. 예서풍으로 행서를 쓰고, 5체 이전의 그림 같은 옛 글자를 툭툭 끼워넣었다. 파격이 절정에 달한‘계산무진(谿山無盡)’은 가운데 부분을 휑하니 비워놓은 채 계곡 물이 콸콸 용솟음치듯 서로 크기가 다른 글자 획들이 서로 어슷비슷 겨루는 기세가 대단하다. 뫼 산(山)자의 중간 삐침을 사람 인(人)자로 붙인 건 추사이기에 할 수 있는 재치다. 흔히 추사체를 괴이하다고 평하지만, 전시장 대련들은 말년의 거장이 품었던 인간미도 여지없이 드러낸다. 타계 두 달 전 쓴 예서대련 ‘대팽두부과강채(大烹豆腐瓜薑菜),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은 노년 추사의 독백과도 같다. ‘좋은 반찬은 두부·오이·생강나물,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라는 뜻의 이 글씨는 젊을 적 학문에 몰두하고, 중년 이후로 정쟁에 휩쓸려 귀양살이로 반생을 보내며 가족과 멀어진 회한이 묻어난다. 간송연구자들뿐 아니라 개막날 찾은 홍라희 리움관장과 아들 이재용 모자, 일반 관객 모두 이 대련 앞에 멈춰서 도란도란 정담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불교중앙박물관 전시는 추사가 만년 과천초당에 은거하며 왕래했던 서울 삼성동 명찰 봉은사와의 인연을 중심으로 풀려간다. 영천 은해사에 써준 ‘불광(불광)’‘대웅전’ 편액과 현판들, 33세의 젊은 시절 쓴 걸작인 해인사 대적광전 중수기 금니명문이 전시되고, 유마거사를 자처했던 그가 덕높은 스님들과 교유했던 묵적의 기록들도 수두룩하게 보인다. 탁본이 나온 봉은사 ‘판전(板殿)’ 현판은 죽기 3일전 쓴 유언 같은 글씨다. 어떤 속된 기운과 기교도 없는 고졸한 기운이 속속 배어든 이 글씨는 추사체의 완성을 상징하는 마지막 불꽃과도 같다. 넘치는 관객들로 몸살을 앓았던 간송미술관은 올해부터 전화(070-7774-2523)와 이메일(reserve@kansong.org)로 예약을 받아 입장시키고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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