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음악·공연·전시

신해철, 그는 대답할까…지나간 세월에 후횐 없노라고

등록 2014-10-28 19:48수정 2014-10-29 11:42

‘마왕’ 으로 불렸던 가수 신해철이 우리 곁을 떠났다.
‘마왕’ 으로 불렸던 가수 신해철이 우리 곁을 떠났다.
‘마왕’ 신해철을 떠나보내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을 맘에 갖고 있어/유치하다고 말하는 건 더 이상의 꿈이 없어졌기 때문이야” (넥스트 ‘히어로’)

한 명의 영웅이 세상을 떠났다. 이것은 흔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다. 그는 19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한 번쯤 통과의례처럼 지나야 하는 상징과 같은 인물이었다. 신해철이란 이름은 한 시대를 대변하는 이름이었고, 음악적 신뢰와 실험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1988년 성탄 전야에 열린 대학가요제 무대. 한 번만 들어도 잊을 수 없는 도입부가 울려 퍼지던 순간, 노래의 마지막에 “내 삶이 끝날 때까지 언제나 그댈 사랑해”라고 속삭이듯 노래하는 순간, 많은 이들이 걸출한 음악가의 탄생을 예감했다.

‘그대에게’로부터 시작한 그의 음악 여정은 놀라움과 파격과 실험으로 가득했다. ‘인기’가수의 길을 걸었던 솔로 시절에도 그는 프로듀서로서 자신의 앨범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고, 90년대의 시작과 함께 윤상, 송재준 등과 미디음악(실제 악기 대신 컴퓨터로 만드는 음악)의 선구자로 얘기될 만큼 새로운 경향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다. 이후 안정적인 솔로 가수의 길을 포기하고 록 밴드 넥스트를 결성한 것도 파격이었지만, 넥스트를 통해 들려준 음악은 더 파격이었다.

록·메탈서 일렉트로니카까지
한국대중음악 수준 끌어올리고
인디음악 알리는데 적극적 역할
1990년대를 지나온 이들에겐
통과의례처럼 지났던 ‘상징’

1992년 첫 앨범을 발표한 이후 넥스트는 넉 장의 앨범을 통해 우리도 이 정도 수준의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New Experimental Team’이라는 팀명처럼 그 전까지 한국 대중음악계에선 쉽게 들을 수 없던 새롭고 실험적이고 강한 록·메탈 음악을 전면에 내걸었다.

2집 (1994)에 실린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와 ‘이중인격자’ 같은 곡들은 외국의 헤비메탈만을 듣던 애호가들의 귀를 잡아끌기에 충분했다. 역시 같은 앨범의 마지막 곡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는 제목처럼 영원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을 아트 록 명곡이었다. 3집 (1995)에 실린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의 리프나 구성은 말 그대로 세계 수준이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철저하게 비대중적인 음악을 가지고 대중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밴드 무한궤도로 데뷔한 가수 신해철은 솔로 앨범 6장, 밴드 넥스트 앨범 4장 등을 통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을 꾸준히 선보였다.
밴드 무한궤도로 데뷔한 가수 신해철은 솔로 앨범 6장, 밴드 넥스트 앨범 4장 등을 통해 파격적이고 실험적이면서도 대중적인 음악을 꾸준히 선보였다.
넥스트는 당시 스타디움에서 공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록 밴드였다. 그만큼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으며 종교 부흥회를 연상케 한다는 얘기를 들을 만큼 새로운 공연 문화를 선도했다. 그 지지의 배경에는 넥스트와 동시대를 산 젊은이들이 있었다. 노랫말을 도맡아 쓴 신해철은 동시대의 청년과 학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근사하게 풀어 쓸 수 있는 재능이 있었다. 그는 노래를 통해 교육, 환경, 낙태, 동성동본 문제를 얘기하고 현대인의 외로움을 얘기했다. 지금 이런 노랫말을 썼다면 허세나 중2병 정도로 가볍게 치부될 수 있겠지만, 그의 시대는 아직까진 진지함이 받아들여지는 시대였다. 그의 죽음 뒤로 많은 이들이 그에게 부채의식을 느끼는 것은 그가 그때 우리의 생각과 이야기를 대변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신이 속해있던 대중음악계의 영역을 더 넓고 깊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윤상과 함께 노땐스(No Dance)라는 프로젝트 팀을 만들어 그저 댄스 음악으로 치부되던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진지하게 접근하고자 했고, 일렉트로니카는 록과 함께 신해철 음악의 양대 축이 되었다.

신해철, 시대를 대변하는 이름이자
음악적 신뢰와 실험의 이름이었다
이렇게 한 명의 영웅이
또 세상을 떠난다

넥스트와 모노크롬 등의 프로젝트를 통해 이룬 사운드 프로덕션의 성취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것이었다. 그가 맨땅에 부딪쳐가며 얻은 경험과 지식은 그대로 후배들에게 전달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데뷔 앨범을 만들었던 전람회가 대표적이고, 그밖에도 많은 후배들이 수혜 대상이 됐다. 그로 인해 90년대 한국 대중음악계가 한층 더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그는 음악가로서뿐 아니라 전달자로서도 음악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디제이로 한국 인디 음악을 비롯해 비주류 음악을 알리는 데 적극적이었다. 세상을 떠난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절룩거리네’가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데는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를 두 번 틀고는 이런 노래는 한 번 더 들어야 한다며 세 번 연속으로 같은 노래를 튼 것도 그였다. 그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인디 음악이 소개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고, 그는 인디 음악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이자 조언자였다.

오랜 음악적 침체를 겪은 뒤 그는 적극적으로 재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최근 공개한 ‘아따(A.D.D.A)’와 ‘I Want It All’은 다시금 기대를 갖기에 충분한 매력적인 곡들이었고, 넥스트의 재결성을 선언한 그에 곁엔 창단 멤버인 정기송이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대를 뒤로 하고 갑작스레 그는 떠났다. 굳이 감상적인 말을 덧붙이진 않겠다. 그가 남긴 노래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오래도록 우리의 곁에 있을 것이다. 그는 우리의 영웅이었다. 우리의 추억을 그와 90년대에 바친다.

김학선 대중음악평론가 studiocarrot@naver.com

신해철이어서 할 수 있던 말…“MB는 박정희 아닌 전두환”

신해철, 그가 세상에 남긴 말들

‘마왕’ 신해철과의 추억…대중은 아직 그를 놓치 못했다

‘민물장어의 꿈’ 음원차트 1위

신해철 “내 장례식에서 퍼질 곡”…‘민물장어의 꿈’ 재조명

신해철 3년 전 유언장…“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서태지 “신해철은 내게 산과 같은 존재” 추도문

남궁연 “신해철, 독설가 아닌 순진하고 따뜻한 친구”

“지성 갖춘 강심장이었다”…신해철 애도 이어져

“제발 아프지 말아요”…‘마왕’ 신해철 끝내 지다

마주한 풍경이 같아 우리 안에 있는 교주, 라젠카 신해철

서태지는 흉내 못낼 존재를 성찰한 마왕, 라젠카 신해철

[한겨레 프리즘] 신해철의 죽음 / 김양중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