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작가의 선무의 신작 중 하나인 ‘메아리’ 연작.
핏물처럼 흘러내리는 빨간 색면과 심해처럼 검푸른 색면이 큰 화폭 한가운데서 서로 맞선다. 두 색깔이 부딪혀 만든 날카로운 수직의 경계면, 그 아래 섬광처럼 창백한 해골이 그려졌다. 죽음을 낳는 두 색면의 갈등을 증거하는 상징물이다.
탈북 작가 선무(43)씨의 2m 넘는 신작 <리념 2>는 핍진한 색면의 깊이감과 거친 질감이 선뜩하게 다가오는 그림이다. 그가 뼛속 깊이 체감해온 분단의 현실이 북의 붉은색과 남의 파란색이 대립하는 색면을 통해 울려온다.
이 대작이 나온 서울 소격동 트렁크갤러리의 신작전 ‘홍·백·남’(25일까지)은 북한 사회 단면을 풍자했던 이전 작업에 비춰 간단치 않은 변화를 담고 있다. <리념 2>처럼 붉고 푸른 추상적 색면이 압도하는 그림들과 종이를 오려붙여 절규하는 인물군상을 묘사한 ‘메아리’ 연작(사진) 등이 등장한다. 작가는 신작들이 최근 자신을 엄습했던 봉변의 기억에서 착상한 것이라고 했다.
작가는 7월 중국 베이징 한 미술관에서 북한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전시하려다 개막날 북한대사관의 신고를 받은 중국 공안들이 급습해 작품들을 압수하면서 황급히 귀국해야 했다. 북한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2001년 두만강을 건너와 남한 공민이 됐지만, 여전히 분단 사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 사건이었다.
화면 맨 위의 작은 인물들 외엔 전체 화폭을 흘러내리는 붉은 화면으로만 채운 ‘별빛’ ‘노루잡이’ 등이 출품작들을 돌려받지 못한 채 지금도 신변에 불안을 느끼며 사는 작가의 심경을 드러낸다. 압수된 설치작품을 재현한 ‘선무의 노래’는 북한 국기가 그려진 커튼 아래 무궁화 등의 조화들이 철조망과 함께 담긴 꽃병을 통해 분단 칼끝에 선 탈북자의 처지를 은유한다. 작가는 전시 팸플릿에 독백처럼 지은 노래 가사를 적어 넣었다. “세상의 평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죄’가 되어 돌아왔다. … 그 ‘죄’인이 북경에서 전시하면서 소리쳐 부르려고 했던 노래가 여기 있다.” (02)3210-1233.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트렁크갤러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