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황재섭무용단 제공
황재섭무용단 ‘문학과 춤의 만남’
22~23일 ‘유리’ 공연 연습 한창
70분간 박상륭 소설 춤으로 표현
22~23일 ‘유리’ 공연 연습 한창
70분간 박상륭 소설 춤으로 표현
밤 11시를 넘긴 시간, 11명의 춤꾼이 모여들었다. 국공립무용단의 단원, 직장인, 대학을 다니거나 강의를 나가는 이들이 뒤섞여있었다. 그러니 모두 모이려면 깊은 밤밖에 시간이 없었다. 서울 세종문화회관 5층 서울시무용단 연습실, 17일 밤부터 18일 0시40분까지 ‘심야의 춤판’이 벌어졌다. 황재섭무용단의 춤꾼들은 22, 23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유리> 공연을 앞두고 있다. 황재섭 안무가가 500쪽이 넘는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를 70분짜리 춤으로 만든 것이다. 그는 ‘문학과 춤의 만남’이라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심야의 춤꾼 11명이 하얀 가면을 쓰고 등장했다. 마룻바닥을 기고 물고기처럼 흐느적거렸다. 가면은 자신의 욕망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장치다. 가면을 벗었을 때, 그들은 욕망의 민낯이 된다. 춤꾼들은 화두를 잡았다. “마른 늪에서 고기를 낚아라.” 깊은 밤 춤꾼들의 춤은 기나긴 구도의 여정과 같다. 그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과연 어딜까?
<죽음의 한 연구>는 주인공 육조(혜능)를 통해 ‘마른 늪에서 고기 낚기’라는 불모에서 생명을 탐구하는 구도 방법론을 제시한다. 육조는 ‘유리’라는 중국 문왕이 역(易)을 완성했다는 가상의 공간에서 수행을 한다. 작품은 육조의 살인과 죽음을 통해, 세속적 물신주의 때문에 무력해진 정신성에 주목한다.
황재섭 안무가가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모든 것이 쉽고 간단한 현대사회에서 올바른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죽음의 근원으로부터 성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해온 ‘문학과 춤의 만남 시리즈’는 <유리>를 비롯해 <나를 찾아가는 여행>(소포클래스의 오이디푸스), <멀리 있는 빛>(김영태의 멀리 있는 무덤), <사자(死者의 서(書)>(단테 신곡 중 지옥편), <금(琴)>(김훈의 현의 노래) 등이다.
“안무를 하면서 느끼는 절실함은 ‘무엇을 얘기할 것인가’이었습니다. 먼저 책을 읽었지요. 그리곤 책과 삶을 연결하려 문학과 춤의 만남이라는 기획을 내놓았습니다. 공연예술 무용과 책이 서로 소통하는 겁니다. 책을 읽은 분들은 무용을 통해 다른 공간과 육체를 경험할 수 있고, 읽지 않은 분들은 무용을 보고 나서 책을 한번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특히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는 읽기 까다로운 책으로 유명하다. “처음에 2쪽을 읽는 데 몇 시간이 걸렸어요. 그러다 ‘깊이 읽기’라는 해설서도 사보고 나니까 좀 이해가 되더라고요. 움베르토 에코를 읽을 때와는 달리, 전라도 사투리가 밴 박상륭의 글은 소리 내 읽으면 낭독의 재미가 있습니다.”
0시30분, 춤사위가 절정으로 치닫는다. 11명의 춤꾼이 모인 이곳은 어딘가? 일찍이 문왕이 유배돼 역(易)을 완성한 곳, 샤머니즘·불교·기독교가 뒤엉킨 환상과 신화의 공간 ‘유리’다. 심야의 춤꾼들이 그물에 걸려 파드득거린다. 아니, 그물을 쳐 물고기를 잡는지도 모른다. 숨가쁜 춤판의 맥박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연습실 벽을 채운 유리에서, 춤꾼들의 뒷모습이 하나 둘씩 사라졌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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