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마리스 얀손스가 18, 19일 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2년 만의 내한 공연을 펼쳤다. 빈체로 제공
[리뷰] 바이에르방송교향악단 공연
많은 음악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거장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71)는 포디엄(지휘대) 위에서 일말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주의자다. 그의 연주를 듣자면, 관현악곡의 세밀한 건축 설계도가 머릿속에 펼쳐지는 듯하다. 곡을 떠받치는 거대한 골조에서부터 세부를 구성하는 벽돌의 잔무늬까지 낱낱이 음으로 구현해내는 테크닉, 고도로 정제된 음향은 장인의 공예품을 연상시킨다. 지난 2012년 그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은 그런 장점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레퍼토리였다.
고도 정제된 음향 흠잡을 데 없지만
‘돈 후안’ 유머·쇼스타코비치의 고락
스토리텔링 못살려 결핍감 느껴져 18, 1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다시 선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여전한 솜씨를 과시했다. 첫째 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은 다른 어떤 오케스트라도 들려준 적 없는 것이었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호른 앙상블과 고요히 흘러가는 목관 독주,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현악 파트의 온기는 북극의 빙하라도 녹일 듯 따스했다. 이어진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두텁게 음향층을 쌓으면서도 투명함을 잃지 않는 조향 능력이 돋보였다. 육중한 문을 밀어내고 섬광처럼 뻗어 나가는 제10곡 ‘키예프의 큰 성문’ 엔딩은 세련미의 극치였다. 둘째 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악기의 카논, 빛나는 음향을 쏟아내는 금관과 타악 앙상블 등 얀손스에 의해 조련된 오케스트라는 기교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연주회 모두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유는 표제음악이거나 표제음악적인 스토리텔링을 내재한 작품들로 이뤄진 선곡에 있었다. 점점 더 절대음악으로 나아가는 얀손스의 지휘봉 끝에서 표제음악 특유의 서사는 상당 부분 거세됐고 그로 인해 본연의 매력을 놓쳐버렸다. 얀손스의 완전무결한 테크닉과 세련된 음향도 스토리텔링의 단절에 따른 결핍감을 메우지는 못했다. 이번 공연에 대한 청중의 만족과 불만족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갈렸을 듯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둘째날 연주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주앙’과 ‘장미의 기사 모음곡’이었다. 관능과 쾌락, 고독과 회한의 감정이 넘실대는 호색한 돈 주앙의 일대기, 빈 상류사회 연애소동의 유머러스함은 묘사력을 잃으면서 맥락 없이 공허해졌다. 아메리카적 정서과 보헤미아의 향수가 짙게 배어나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슬라브 전설의 멜랑꼴리와 공포감을 품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도 특유의 민속주의적 색채가 흐려지면서 때때로 지루하게 들렸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역시 애호가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는 빈 필과의 녹음(1997 EMI)과는 사뭇 달랐다. ‘고뇌’, ‘극복’, ‘환희’로 진행하는 극적인 전환이 누그러져 매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김소민 객원기자 somparis@naver.com
‘돈 후안’ 유머·쇼스타코비치의 고락
스토리텔링 못살려 결핍감 느껴져 18, 19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다시 선 얀손스와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여전한 솜씨를 과시했다. 첫째 날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2악장의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은 다른 어떤 오케스트라도 들려준 적 없는 것이었다. 벨벳처럼 보드라운 호른 앙상블과 고요히 흘러가는 목관 독주, 모든 것을 감싸 안는 현악 파트의 온기는 북극의 빙하라도 녹일 듯 따스했다. 이어진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두텁게 음향층을 쌓으면서도 투명함을 잃지 않는 조향 능력이 돋보였다. 육중한 문을 밀어내고 섬광처럼 뻗어 나가는 제10곡 ‘키예프의 큰 성문’ 엔딩은 세련미의 극치였다. 둘째 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에서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현악기의 카논, 빛나는 음향을 쏟아내는 금관과 타악 앙상블 등 얀손스에 의해 조련된 오케스트라는 기교적으로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하지만 두 번의 연주회 모두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유는 표제음악이거나 표제음악적인 스토리텔링을 내재한 작품들로 이뤄진 선곡에 있었다. 점점 더 절대음악으로 나아가는 얀손스의 지휘봉 끝에서 표제음악 특유의 서사는 상당 부분 거세됐고 그로 인해 본연의 매력을 놓쳐버렸다. 얀손스의 완전무결한 테크닉과 세련된 음향도 스토리텔링의 단절에 따른 결핍감을 메우지는 못했다. 이번 공연에 대한 청중의 만족과 불만족은 아마도 이 지점에서 갈렸을 듯하다. 특히 아쉬웠던 것은 둘째날 연주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돈 주앙’과 ‘장미의 기사 모음곡’이었다. 관능과 쾌락, 고독과 회한의 감정이 넘실대는 호색한 돈 주앙의 일대기, 빈 상류사회 연애소동의 유머러스함은 묘사력을 잃으면서 맥락 없이 공허해졌다. 아메리카적 정서과 보헤미아의 향수가 짙게 배어나는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슬라브 전설의 멜랑꼴리와 공포감을 품은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도 특유의 민속주의적 색채가 흐려지면서 때때로 지루하게 들렸다.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 역시 애호가들의 뇌리에 각인돼 있는 빈 필과의 녹음(1997 EMI)과는 사뭇 달랐다. ‘고뇌’, ‘극복’, ‘환희’로 진행하는 극적인 전환이 누그러져 매력은 예전 같지 않았다. 김소민 객원기자 sompari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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