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이 70대 중반에 부채에 그린 ‘금강내산’
간송문화전 ‘진경산수화’ 꾸려
정선 금강내산 부채그림 압권
김홍도·이인문·심사정 필력도
정선 금강내산 부채그림 압권
김홍도·이인문·심사정 필력도
거장의 그림도 장맛이다. 세월 갈수록 화폭 속 시선은 깊어지고 시야는 넓어진다. 특히 말년작들은 실물과 닮았냐를 따지는 사실성의 잣대를 뛰어넘곤 한다. 색조의 장관을 빚어낸 렘브란트의 말년 자화상과 모네의 수련 풍경에 우리가 감동하는 이유다.
이땅에도 사실성을 초월한 거장이 있다. 18세기 조선 산하 경치에서 참기운을 뽑아 그린 겸재 정선(1676~1759). 70대 중반 그가 그렸다는 ‘금강내산’ 부채그림을 본다. 금강산 만이천봉이 작은 선면에 바위산, 흙산 덩어리로 뭉쳐졌다. 그 덩어리감이 기운으로 변해 관객의 눈 속으로 짓쳐들어온다. 부채 속 산덩어리는 겸재가 금강산 곳곳을 수십년 뚫어보며 가슴에서 숙성시킨 하나의 관념이다. ‘금강대’는 내금강의 꼿꼿한 봉우리 하나만 비칠 뿐이다. 하지만, 화폭의 푸른 적막 속에서 철렁거리는 존재감은 강렬하다.
간송미술문화재단이 서울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 14일 시작한 ‘간송문화전 3부-진경산수화’ 전은 18~19세기 한국 회화사 거장들의 거장성과 만나는 자리다. 그들이 성리학 사상의 렌즈로 구현한 진경산수의 흐름이 보이고, 이땅 곳곳 산야의 실제 장관을 옮겨 생기 깃든 경치로 승화시킨 그림들이 차고 넘친다. 18세기 회화사를 휘저었던 겸재의 쌀알 같은 흙산 미점과 내다꽂는듯한 서릿발 산세를 보고, 현재 심사정의 단아하면서도 단단한 필력을 음미한다. 진경산수 정신을 꼼꼼한 실경 묘사에 녹여낸 단원 김홍도의 금강산 대작, 정교한 필치에 우아한 구도로 짜여진 이인문의 소품 풍경들이 차례차례 등장한다.
간송 컬렉션의 대명사는 단연 겸재다. 전시의 시작도 겸재가 본 관동 절경이며, 중반부는 저유명한 금강전도 연작들이 이끌어간다. 전시 말미는 그가 거닐며 살았던 서울 인왕산, 백악산 산록과 한강 주변 수도권의 경치를 묘사한 화첩으로 맺는다. 뻣뻣하게 치솟으며 남성적 기운을 내뿜는 울진 성류굴의 바위봉우리가 처음 내걸린 그림이다. 비릿하고 습한 바다내음이 흥건한 먹바다 소나무숲에 묻어나오는 평해 월송정 정경과 강원도 통천 문암 앞바다 파도들의 울렁울렁 솟구치는 곡선에서 20세기 현대미술의 추상정신을 거장이 200여년전 선취했음을 알게 된다.
낙엽가지 모양으로 산세, 계곡을 쓸어내리듯 묘사한 단원의 금강산 그림들은 또다른 진경이다. 외금강 구룡연, 내금강 명경대를 그린 대작들은 겸재보다 꼼꼼하면서도 유연한 실경 탐구의 산물이다. 등뼈처럼 휘어진 절벽 길로 총석정 부근의 정경을 압축해 묘사하고 선경 같은 푸른빛 바다에 주상절리 기둥과 파도를 담은 이인문의 소품화는 격조높은 총석정 그림의 명품이다. 북악산에서 백악산으로 뻗치는 산세의 약동과 한강변 마포의 정자 담담정의 맑고 한가한 기운을 뽑아낸 김득신·김석신의 풍경그림도 보는 맛이 신선하다. 겸재 화풍을 본뜨거나 장식화에 가까운 19~20세기 후대 화인들의 산수화들도 내걸려 18세기 진경화풍의 경지를 더욱 실감할 수 있다.
전시공간은 진경산수의 역동성과 어울리지 않는 편이다. 작품별 조명을 쓰지않은 탓에 조명빛은 한결 칙칙하다. 진열장은 비용 탓인지, 간송문화전 1, 2부 전시 때보다 확 줄었다. 공간 곳곳이 빈 퀭한 느낌이 전시의 감흥과 기묘하게 맞물린다. 내년 5월10일까지. 1644-1328.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간송미술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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