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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한획 한획 벼린 글씨, 과연 김충현

등록 2015-01-13 19:50수정 2015-01-13 22:18

‘명필 서예가’ 일중의 현판 모음전
선이 취한듯 꿈틀대는 ‘예천법가’
내소사 4행주련 등 실물 28점
사찰 등에 흩어진 사진·탁본 전시
독립기념관·원효대교 글씨 친숙
‘독립기념관’ 한글현판
‘독립기념관’ 한글현판
9년 전 세상을 등졌으나 지금도 나라를 대표하는 명필, 이른바 ‘국필’(國筆)로 세간에서 일컫는 서예가가 있다.

해방 이후 소전 손재형과 더불어 한국 서예판을 세운 거장인 일중 김충현(1921~2006). 그의 이름 앞에는 거목, 종장(宗匠·우두머리), 서백(書伯) 같은 숱한 존칭이 따라붙는다. 우리 근현대 서예사에서 일중만큼 다방면에 굵은 발자취를 새기며 카리스마를 뿜었던 서예가는 없었다. 장동 김씨 명문가 출신인 일중은 생전 ‘국문’이라고 불렀던 한글 서예에서 전통 궁체와 <훈민정음>의 고체를 연마해 독창적 경지를 열어젖힌 주역이었다. 전·예·해·행·초서 등 한문의 5가지 서체에 두루 통달해 막힘 없이 각 서체를 융화시키며 추사 김정희가 일찍이 제시했던 법고창신의 서예를 이룩해 나갔다. 1960년대부터 동방연서회와 일중묵연 서실을 만들어 후학들을 키웠으며 당대 미술인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친 산맥 같은 스승이 일중이었다. 공모전이 남발되고, 스승이 제자에게 자기 글씨를 판박이로 베끼게 하고 중국 글씨첩만 주문처럼 외는 지금 서예판에서 그의 부재는 더욱 허허롭기만 하다.

을미년 새해 일중 서예의 또다른 진수인 현판 수작들을 처음 한자리에 모아 선보인다는 낭보가 들려온다. 1983년, 만년의 일중이 서단의 미래를 내다보고 만든 보금자리였던 서울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15일부터 2월25일까지 열리는 ‘김충현 현판글씨, 서예가 건축을 만나다’전이다. 일중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년)가 차린 이 기획전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이다. 나라 곳곳의 공공건물, 사찰, 서원, 지인들 집 등에 흩어진 거장의 현판 175점을 모아 사진·설명을 붙인 종합도록이 함께 나올 뿐 아니라 전시장에는 현판 실물 28점을 비롯한 사진, 탁본 47점이 나온다. 기획자인 서예연구자 정현숙씨는 “일중은 42년부터 97년까지 반세기 넘게 현판을 썼다”며 “모든 서체를 넘나들고, 현판과 건축물 성격에 맞춰 다채로운 풍격을 표현했던 그였기에 나올 수 있는 전시”라고 했다.

일중 김충현이 제자의 집 당호로 써준 ‘예천법가’.  본문 예서와 낙관의 초서 글씨들이 사람 표정이 바뀌듯 기운생동하는 득의작이다.
일중 김충현이 제자의 집 당호로 써준 ‘예천법가’. 본문 예서와 낙관의 초서 글씨들이 사람 표정이 바뀌듯 기운생동하는 득의작이다.
출품작들은 사적인 인연으로 쓴 1, 2층의 1부와 공적인 요청을 받고 쓴 3층의 2부로 나뉜다. 가장 뛰어난 수작들은 일중 서예의 고갱이 격인 1부의 예서 글씨들이다. 연꽃처럼 부드럽고 온화한 필치에, 획 사이 성김과 뻑뻑함의 대비가 뚜렷한 내소사 천왕문 4행 주련은 예서의 세련된 조형미를 한껏 과시한 전시의 대표작이다. 술 마신 듯 흥취에 젖어 제자 권창륜씨의 예천 집에 써붙여준 ‘예천법가’(醴泉法家:예천의 대가)는 글씨 획들의 변화무쌍한 꿈틀거림이 눈을 사로잡는다. 초창기 소박한 필법이 깃든 그의 살림집 현판 ‘오산봉포’(梧山鳳苞), 조순 전 서울시장의 강릉 집에 붙여준 ‘소천서사’(少泉書舍), 인사동 한정식집 현판 ‘선천’(宣川) 등이 눈 돌릴 사이 없이 이어진다. 전주의 서예대가 강암 송성용에게 써준 ‘남취헌’(攬翠軒)은 깎아낸 비늘무늬 표면의 칼칼한 질감과 유려한 글씨의 어울림이 일품이다. 67년 한산도 이충무공 사당 제승당에 걸었다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에 밀려 사라졌던 또다른 걸작 ‘충무영당’(忠武影堂)을 최근 찾아 내건 것도 큰 성과다.

일중 예서의 대표작인 내소사 천왕문 주련
일중 예서의 대표작인 내소사 천왕문 주련
10대 때 주요 한문 고전을 독파하고 20~30대 한나라 옛 비석글씨와 당대 이후의 해서, 행서, 초서첩 연마에 몰두했던 일중은 해서, 행서 쪽에도 뛰어난 현판들이 많다. 문중 선조들과 인연이 있는 하남 사충서원과 영암 녹동서원의 해서체 현판은 안진경 서풍의 엄정, 강건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2부에는 한글 현판 대작인 ‘독립기념관’, 경복궁 동서문인 ‘건춘문’과 ‘영춘문’, ‘사직단’ 글씨의 사진들과 ‘원효대교’ ‘한강대교’ 등의 탁본들이 친숙한 감흥을 전해준다.

64년 서울대 옛 동숭동 교정 정문에 붙었던 ‘서울대학교’ 석판(현 서울대기록관 소장)은 새로 발굴된 작품이지만, 나오지 못했다. 사업회 쪽은 이 석판이 일중의 것임을 연보를 통해 밝혀냈으나,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며 대학 쪽이 대여를 불허해 출품할 수 없었다고 한다. (02)734-4205.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도판 일중선생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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