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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버티거나 무너지거나…재난 앞의 인간이란

등록 2015-01-28 19:14

사진 그린 피그 제공
사진 그린 피그 제공
[리뷰] 연극 ‘174517’
“헬기나 해양구조대를 보내줘야 하는 거 아녜요? 저는 구조대가 올 때까지 살아남을 거예요!” 한 사람이 간절한 기대와 의지를 보인다. 하지만 다른 한 사람은 매몰차게 뭉갠다. “구조대 같은 건 없어!” 절망의 재난 현장이다. 무대 앞엔 철망, 뒤엔 시멘트 댐, 옆엔 철골 작업대가 있다. 어수선한 토목 구조물들은 위태롭고 조악한 세계를 상징한다. 재난은 상존하므로, 인간은 피해갈 힘이 없다. 일상이 된 재난 속에서 인간은 때로는 힘겹게 버티지만, 때로는 정신줄을 놓고 서로 욕설을 퍼붓는다. 디스토피아의 희비극적이고 부조리한 상황이다.

지난 23일 막을 올린 극단 그린피그의 <174517>(전성현 작, 윤한솔 연출)은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한다. 대체 무슨 연극이 이렇지? 기승전결을 제거한 연극은 여러 인물이 번갈아가며 주인공을 맡는다. 정착된 주제보다는 여러 주제를 옮겨다니는 떠돎의 세계, 곧 디아스포라다. 주인공들의 헬멧에 부착된 카메라는 재난 현장과 벌거벗은 군상을 다큐멘터리처럼 찍는다. 그리고 무대 뒤편 스크린에 실시간으로 투영한다. 움직이는 카메라와 피사체는 불안을 고조시킨다. 저화질 영상은 조악한 세계에 대한 조롱이다.

무대 앞엔 철망, 뒤엔 시멘트 댐…
일상화된 재난과 인간군상 그려
프리모 레비 수인번호 제목으로

이 작품은 일상화된 재난을 씨줄로 삼고 ‘연극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날줄로 삼아 교직했다. 배우들은 지속적으로 ‘이게 말이 되느냐’라며 작가의 존재가치를 의심한다. 그러므로 이 연극은 연극 만들기에 대한 연극이다. 인물들의 이름도 다자이 오사무 등 유명 극작가들한테서 따왔다. 가나, 다라, 마바라는 이름은 작가가 건설한 문자의 세계에 대한 역설적 조롱이다. 재난 속의 세계에서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가. 주인공의 이름엔 로자 룩셈부르크도 나오고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도 나온다. 다양한 인간 군상의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끝내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설명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해 말이 너무 많았어!” 연극은 끝나도, 그것 참, 연극은 끝나지 않는다. 막이 내리고 불이 들어왔지만 계속해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관객 일부는 자리를 떴지만, 대부분은 일어서야 하는지 마는지 고민했다.

<174517>은 작가 전성현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젊은 예술가 지원사업 선정작이다. 그런데 ‘174517’은 뭘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 작가 프리모 레비(1919∼1987)의 수인번호다. 혹시 000이라는 실명의 존엄함이 엄존함에도, 주민으로 등록된 ‘쯩’ 번호로 인증되는 한국사회를 빗댄 건 아닐까? 대학로 정보소극장에서 2월1일까지.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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