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채향순의 <승무>, 류영수의 <한량무>, 이미영의 <민살풀이>
15일 ‘한국춤 100선 열두마당’
승무·허튼춤·한량무·부채춤 등
각자 스승에게 바치는 춤 선봬
2대 이은 3대 제자들도 무대에
승무·허튼춤·한량무·부채춤 등
각자 스승에게 바치는 춤 선봬
2대 이은 3대 제자들도 무대에
하얀 고깔에 긴 소맷자락의 장삼. 어깨엔 붉은 가사를 맸다. 목탁 장단에 맞춰 어깨춤이 장삼을 따라 하늘로 솟구쳤다. 허공에 정점을 찍은 어깨춤은 허리와 다리를 타고 흰 버선코 끝으로 내려앉았다. 치마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한 발디딤새. 이번엔 북채를 잡은 양손에 힘이 들어갔다. 법고를 두드리며 객석의 가슴도 함께 두드렸다. 흠씬 두들겨맞은 객석에선 단말마 같은 추임새를 토했다. “어이쿠!” “얼씨구!” 채향순의 <승무>다. 그는 이 춤을 우봉 이매방한테 배웠다.
이매방은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다. 채향순은 “내 모든 그리움은 발끝에 닿아있다. 춤과 소리와 가락을 아울러 연희의 세계를 통합하는 작업이 내 그리움의 끝이다. 그 그리움은 바로 이매방 선생님이다”라고 했다. 이매방~채향순으로 이어진 <승무>는 다시 제자 박차은으로 전해졌다. ‘승무 3대’가 한 몸짓, 한 호흡이다.
한국춤의 스승과 제자, 그 절절한 그리움이 춤이 됐다. 스승을 우르른 치사랑과 제자를 굽어본 내리사랑이 한 무대에 섰다. 해마다 2월 찾아오는 ‘한국춤 100선 열두마당’이 올해는 ‘치사랑과 내리사랑’을 주제로 내걸었다. 공연은 15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1, 2부로 나눠 진행했다. 1부에선 스승의 다음 세대 교수 등이 춤을 췄고, 2부에서는 2대에 이어 3대 제자들이 무대에 섰다. 300여 석을 가득 채운 관객의 박수도 치사랑으로 치솟았고, 내리사랑으로 쏟아졌다.
무대는 박은영의 춤으로 시작됐다. 봄 꾀꼬리(춘앵)가 나타났다. 정중동. 움직이지 않는 듯, 움직였다. 미동(微動)이되, 율동(律動)이다. 어깨를 슬쩍 들썩이자 몸이 조심스레 파도를 탔다. 하얀 버선코를 감춘 치마 속에선 연신 무릎 굽힘과 발디딤이 쉼 없이 이뤄졌다. 봄날 나뭇가지에서 노래하는 꾀꼬리의 자태를 본뜬 궁중무용 <춘앵전>이다.
박은영이 스승에게 바치는 춤이다. 스승 김천홍(1909~2007)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나온 악사요, 춤꾼이었다. 1932년에는 한성준(1874~1941)에게 민속춤을 배워 1955년에 김천흥 고전무용소를 열었다. 박은영은 “선생님은 늘 잔잔한 미소와 단아한 모습으로 제자들의 춤을 다듬어주셨다”고 회상한다. 김천흥에게 배운 박은영의 춤은 다시 3대 이선희에게 이어졌다.
이날 공연에서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춤이 눈길을 잡아챘다. 문일지의 <허튼춤>을 이어받은 김삼진의 춤이다. 자진모리로 몰아치는 산조 가락에 맞춰 태엽처럼 착착 감긴 몸이 일순간 태엽이 풀리듯 팽그르르 팽이처럼 돌았다. 전통춤이되, 전통춤에 머물지 않고 현대춤 또는 컨템퍼러리 춤으로 한발 더 내딛었다. 스승 문일지가 강조하던 말은 “실험적인 창조작업의 계속”이었다. 객석의 반응이 뜨거웠음은 물론이다.
이날 무대는 한 사람 당 5~10분 이어졌다. 깊고 내밀한 춤의 속살을 보여주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춤의 많은 부분을 한자리에서 ‘압축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스승을 기리는 1부 ‘치사랑’ 무대에는 김천흥·한영숙·이흥구의 <학춤>과 김천흥의 <춘앵전>(박은영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이동안의 <진쇠춤>(윤미라 경희대 교수), 조갑녀의 <민살풀이>(이미영 국민대 교수), 강선영의 <태평무>(임현선 대전대 교수), 한영숙·정재만의 <살풀이>(차수정 숙명여대 교수), 김백봉의 <부채춤>(전은자 성균관대 교수), 최현의 <비상>(원필녀 최현 우리춤원 고문), 이매방의 <승무>(채향순 중앙대 교수), 김조균의 <한량무>(류영수 서울종합예술학교 교수), 문일지의 <허튼춤>(김삼진 한예종 교수)이 올랐다. 이들의 제자가 꾸미는 ‘내리사랑’ 무대에는 이미영에게 배운 <태평무>의 서예우 등 12명이 춤판을 벌였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궁중무용춘앵전 보존회 제공
김삼진의 <허튼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