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사진가 이갑철(56)씨의 사진들은 불안하고 스산하다. 초점없이 흔들리며, 배경이 휙 기울어지고, 피사체들은 뭉텅 잘려나가기 일쑤다. 치밀한 촬영 준비보다 마음 자세, 직관을 역설해온 작가는 마음 꽂히는대로 줄곧 스냅 컷 필름만 찍는다. 수행자의 눈길 같기도 한 그의 카메라 뷰파인더에 최근 항구도시 부산의 구석구석이 빨려들어왔다. 여느 부산사진과 다르다. 해 저물녘 자갈치 시장 앞을 꾸물꾸물 흘러가는 시커먼 행인들, 수정동 달동네 사진판 앞에서 무심하게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 새벽녘 중앙동 도심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광고전광판…. 빛바랜 부산의 근현대 공간에서 사람들이 부대끼며 울렁거린다. 살아보겠다는 존재의 의지가 공간 속에서 생경한 모습으로 번뜩거리는 부산의 민얼굴이다.
고은사진미술관 ‘부산참견록’ 초청전
자갈치 포구 등 근현대 공간에
사람들 뒤섞여 울렁거리는 풍경
직관의 ‘스냅컷’으로 낚아채
기억·일상 뒤섞인 ‘기이한 부산’
수정동 달동네 전경이 붙은 부산역전의 사진 패널을 담은 ‘부산역’.
이씨는 2002년 출세작인 ‘충돌과 반동’ 전시로 단숨에 한국 사진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당시 굿판과 전통상가 사람들의 귀신들린 몸짓을 좇으며 한국인의 내면의식을 절묘하게 형상화했다는 절찬을 받았던 그가 부산을 찍은 신작들을 들고 전시판에 나타났다. 부산 해운대 고은사진미술관에서 부산의 역사성과 지역성을 기록하기 위해 벌여온 연례기획 ‘부산 참견록’의 세번째 초청작가전 ‘침묵과 낭만’이다. 80년대 ‘거리의 양키들’ ‘도시의 이미지’ 등 당시 도시 현실에 대한 연작으로 데뷔한 작가가 30여년만에 다시 선보이는 도시연작 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않다. 지난해 1년 내내 부산을 돌며 찍은 근작 80여점을 빨강, 회색, 흰색 전시벽에 나뉘어 내건 이 전시는 근대도시의 기억과 지금의 일상이 뒤발된 부산의 낯설고 이상한 풍경들이다. 항구와 거리, 골목에서 포착한 사람과 건물, 사물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부각시켜 그 속에 숨은 기억과 의식들을 비춰준다. 7일 만난 작가는 “부산을 찍어달라는 이상일 관장 부탁을 받고 참견하다보니 ‘낭만’을 발견했다”고 운을 뗐다.
자갈치시장에 모인 중년 친구들의 기념촬영 장면을 옆에서 슬쩍 끼어들어 찍은 ‘자갈치’
“영화 <국제시장>처럼, 옛적 부산이 좋더군요. 직접 겪은 건 아니지만, 어려운 시절 삶을 상징하는 추억공간으로 학습된 부산의 빛바랜 이미지들이 ‘낭만’으로 정리되더군요. 그 느낌을 억지스럽지 않게, 의식에 밴 느낌대로 담으려 했습니다.”
부산의 명물인 산복도로의 봄 풍경을 불안정한 구도로 포착한 ‘부산 동구’.
대상 이면의 보이지 않는 것을 잡아내려고 그간 작업에 투영한 개념이 ‘침묵’이라면, 남포동, 중앙동 같은 낡은 부산 공간의 다기한 움직임을 포착한 신작에는 좀더 감성적이고 구상적인 ‘낭만’의 요소가 배어들었다고 한다. 석양 빛나는 자갈치 앞 바다와 그뒤 부민동 산기슭의 그늘진 시가지를 영도다리에서 포착한 사진이 그렇다. 중절모 신사가 수정동 산복도로의 하얀 벽 앞을 걸어가거나 역광 비치는 자갈치 포구에서 중년남자들이 찍은 기념사진 등에는 60년대 사진의 빛바랜 감수성이 물씬하다. 50여년간 부산풍경과 서민들 삶을 포착했던 대가 최민식의 연작들을 떠올릴 이도 있겠지만, 이씨 사진들은 ‘충돌과 반동’전에서 소스라치게 뿜어냈던 내면의 풍경이 도시 일상에서 감성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이 돋보인다. 남항 포구 조선소의 선박 화재 장면, 소름끼치는 괴물처럼 잡힌 부산영화제 조형상, 밤에 찍은 바지선의 유령선 같은 자태 등에서 귀기어린 순간을 포착하는 특유의 스타일을 엿볼 수 있다. 작가는 “도시는 빛과 건물, 인간으로 구성된다. 과거 근대의 추억 공간에서 빛과 함께 꿈틀거리는 사람들의 움직임 자체를 담는 것이 즐거웠다”고 털어놓았다.
“한국 도시의 그늘을 다룬 사진들로 데뷔했는데, 2002년 ‘충돌과 반동’ 전이 던진 충격 탓인지 지금껏 전통 사진가 이미지에만 갇혀있었어요. 그게 답답해서 수년전부터 전통과 자연을 넘어 문명과 도시를 직관의 시선으로 포착하는 작업을 틈틈이 해왔습니다. 대도시 서울의 이면을 담은 사진들인데, 필름만 거의 5000롤 가량을 찍었어요. 발표는 안했지만, 언젠가는 내보여야겠지요?”
이씨는 곧 열화당에서 출간할 80년대 제주사진집에도 공을 들이는 중이다. 정식 데뷔 전인 80년대초 섬을 오가며 찍었던 그곳 사람들과 자연생태에 대한 미공개 기록들로, 4월초 서울 강남 스페이스 22에서 회고전으로도 작품들을 선보일 예정이다. “올봄 부산과 제주를 다룬 두 전시를 통해 ‘충돌과 반동’으로만 각인된 이갑철 사진의 앞과 뒤가 비로소 채워질 것 같다”고 작가는 웃었다. 5월27일까지. (051)746-0055.
부산/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사진 고은사진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