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헌기 작가의 ‘자화상’. 남북한, 중국의 국기를 그린 뒤 물감으로 덮어 이미지를 뭉갠 화폭에 관객들의 서명을 적게 해 경계인 작가의 고뇌를 표출했다.
중국과 한국 오가며 20년 작업
그 사이에서 발붙일 자리 찾아
고투했던 자신의 삶 형상화
그 사이에서 발붙일 자리 찾아
고투했던 자신의 삶 형상화
“잘 자거라 아가야…백두산 큰 별 너를 지켜준단다, 내 사랑 아가야.”
들머리에서 애잔한 자장가 가락이 울려 퍼진다. 1972년 개봉해 큰 인기를 모았다는 북한 영화 <금이와 은이의 운명>에 나왔다는 자장가다. 이 곡조를 들으며 바라보는 어두운 전시장엔 십여장의 천이 초서 같이 휘갈긴 글씨체 조형물들과 함께 겹겹이 늘어뜨려져 있다. 그 안쪽에는 불켜진 한옥의 창호문이 희미한 빛을 발한다. 천을 헤치며 가장 깊숙한 구석으로 더 들어가면, 엉뚱하게도 한반도의 장래를 논의하는 가상 육자회담을 그린 대형그림이 관객을 맞는다. 만국기로 뒤덮인 미사일을 가운데 놓고 한반도의 장래에 대해 작가와 강대국 수뇌들이 회의를 하는 모습이다.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작업중인 재중동포 중견작가 최헌기(53)씨의 회고전은 이런 기묘하고 애잔한 풍경을 통해 우리 역사에 뒤엉킨 경계인의 삶을 이야기한다. 이산과 역사의 격랑을 넘나들며 20여년을 작업해온 동포작가의 자화상이 그가 직시하는 소재다.
최씨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남도에서 만주로 이주해 백두산벌에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백두산 밀림을 사생하며 화가의 꿈을 키웠고, 베이징에서 술집, 관광사업 등을 하며 치열한 노력 끝에 중앙화단에서 입지를 굳혔다는 작가에게 작품들은 삶을 표상하는 기록이 된다.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작업흐름을 보여주는 출품작들은 ‘광초’라고 명명한 난필의 글씨체 같은 조형물들을 사방에 치렁치렁 늘어뜨리거나 화폭에 채운 것이 특징적이다. 끊임없이 떠돌며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발붙일 자리를 잡으려 고투했던 작가의 삶을 형상화한 지형도가 곧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산과 이념대립의 역사 속에서 몸부림치는 개인의 발자취를 흔적의 조형물로 표출해온 셈이다.
허공에 매달린 마르크스와 마오쩌둥, 레닌의 조상들이 발광심장을 지닌 허수아비와 어울린 대형설치작업은 또다른 맥락에서 이념 시대의 허망한 단면을 짚어낸 작품이다. 5월10일까지 서울 성곡미술관. (02)737-8643.
노형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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