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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음악·공연·전시

거꾸로 건 옷걸이…밀라노에서 만난 기발한 가구들

등록 2015-04-20 19:42수정 2015-04-20 20:10

산업이 아니라 생활에서 디자인을 시작한 문화권에서는 대체로 가구가 중심에 놓인다. 해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구 박람회는 단지 가구 업자들만의 축제가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인 축제다. 지난 14~19일 열린 54회 밀라노국제가구박람회에선 세계각지에서 온 디자이너와 업체들이 다양한 가치를 가진 디자인들을 뽐내며 백가쟁명하고 있었다. 박람회 기간 현지를 방문한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소장이 그 가운데 몇가지 재미있는 디자인을 골라 글과 함께 보내왔다. 앞으로 디자인은 기능만을 좇지 않고 다양한 가치와 재미를 제공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인치피트(incipit)의 옷걸이
인치피트(incipit)의 옷걸이
거꾸로 건 옷걸이가 던지는 인문학적 교훈

옷걸이를 거꾸로 벽에 붙여 놓았을 뿐이지만, 이런 디자인은 할 말을 많게 만든다.

정상적인 옷걸이는 옷을 하나 밖에는 못 걸지만, 이렇게 옷걸이를 거꾸로 붙여놓으면 옷을 걸 수 있는 부부이 세 개로 늘어난다. 그렇다면 이 옷걸이는 세배로 더 기능적으로 되기만 한 것일까?

옷을 거는 옷걸이를 거꾸로 붙여 놓아야 정상적인 옷걸이가 된다는 사실은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선입견을 사정없이 깬다. 사물을 보는 우리들의 눈을 조정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했을 때 정상적인 옷걸이 보다 더 많은 옷을 걸 수 있다는 것은 뒤샹의 변기 작품에 필적하는 인문학적 교훈을 던져준다.

마지스의 의자 스탠리
마지스의 의자 스탠리
명불허전 필립스탁…디자인 거장의 세련미

필립스탁이라는 이름이 세계 디자인의 가장 꼭대기에 올라섰던 것은 1990년대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이 거장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마지스(Magis)와 손잡고 만든 스탠리라는 이름의 의자들 통해 알 수 있었다. 마지스는 플라스틱을 소재로 한 제품을 선보이며 유명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다.

의자의 모양은 미스테리 영화감독 히치콕이 즐겨써서 일명 감독의 의자라 불렸던 의자와 흡사하다. 천으로 된 바닥이 절반으로 접히기 때문에 촬영현장에서 가지고 다니기에 좋았는데, 그런 구조를 그대로 살려서 현대화해 놓았다. 그래서 이 의자는 일단 감독의 의자라는 공통적인 추억을 불러들여 문화적인 신뢰도를 한껏 높이고 시작한다. 동시에 나무 대신 사용한 플라스틱 몸체나, 관절부분을 라운드로 부드럽게 처리한 조형적처리는 매우 현대적이면서도 세련된 느낌을 환기시킨다. 고전적이면서도 미래적인 디자인을 선보여왔던 필립스탁의 매력적인 디자인 세계가 여전하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대리석 조각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서랍장
대리석 조각을 모티브로 디자인한 서랍장
대리석 조각으로 만든 수납장…가구? 조각?

그 누가 위대한 대리석 조각을 하찮은(?) 수납장으로 만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1968년 설립된 이탈리아 가구 회사 드리아데가 선보인 이 서랍장은 관람객들에게 적잖은 미적 충격을 주었다. 피렌체의 어느 광장 한복판에나 서있을 법한 대리석 조각상이 버젓이 서랍장 앞을 장식하게 만들어 관람객들의 눈과 마음을 한 번에 사로잡았다. 이것을 가구라고 해야 할까, 조각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되었던 이 서랍장이 들어간 집의 풍경은 고전적 아름다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조각이 가로로 누운 조각상의 얼굴을 당기면 그림처럼 서랍이 열리니 그 감흥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이런 디자인 앞에서 디자인이 예술인가 아닌가 하는 논쟁은 의미를 잃는다.

쥬버런스의 플라스틱 웨딩드레스
쥬버런스의 플라스틱 웨딩드레스
플라스틱이 웨딩드레스로…기술 위에 올라선 아름다움

이번 박람회에서 특히 눈에 띄었던 것은 중국의 약진이었다.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중국의 디자인은 이제 세계를 이끌어나가는 단계에 올라있었다. 그중에서도 쥬버런스(Xuberance)라는 3D 프린터 기업의 디자인들은 압도적인 중국의 힘을 보여주었다.

요즘 3D 프린터 기술이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쥬버런스의 웨딩드레스를 보면 기술이 끝나는 곳에 예술이 시작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게 된다.

그냥 보면 매우 정성을 들여 만든 드레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머리에 쓰는 베일을 빼고는 전부 플라스틱이다. 그런데 화려한 장식이 너무나 정교하고 아름답다 보니 이것을 만든 기술보다는 이 드레스의 아름다운 모양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조형성이 기술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복잡한 장식들이 유럽적인 것 같으면서도 중국 특유의 곡선적 장식미도 함께 연상시킨다. 무엇보다 전체적인 모양이 너무나 세련되고 조형적 완성도가 높다는 점이 눈에 띈다. 중국의 디자인이 어느새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덴마크 왕립 디자인 건축학교의 학생작품
덴마크 왕립 디자인 건축학교의 학생작품
의자와 미술품, 두 개의 존재감을 왔다갔다

일단 시멘트 덩어리에 긴 등나무 줄기같은 것들이 이리저리 얽혀있는 모습은 현대 설치미술품처럼 보인다. 어느 하나도 기능적인 부분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은 등받이가 없는 의자이다. 등나무가 휘어진 둥근 궤적 위에 앉으면 나무줄기의 탄력이 어떤 체중이든지 어렵지 않게 흡수한다. 시멘트의 묵직한 무게가 의자를 단단하게 고정하기 때문에 넘어지거나 쉽게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의자로 쓰지 않을 때는 전혀 의자인 티를 내지 않는다. 이 디자인의 매력은 바로 그런 데에 있다. 좀 어렵게 비트겐쉬타인의 존재론적 의미로 보자면, 이 물체는 특정한 하나의 존재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의자와 미술품이라는 두 개의 존재감을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이다.

밀라노/최경원·현디자인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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