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아직’의 한 장면.
[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이미 아직’
삶과 죽음 경계 춤동작에 담아
무대위 가여운 혼불들 반짝이고
등대가 된 거울은 남쪽바다 비춰
내년 프랑스 샤요극장서 공연
삶과 죽음 경계 춤동작에 담아
무대위 가여운 혼불들 반짝이고
등대가 된 거울은 남쪽바다 비춰
내년 프랑스 샤요극장서 공연
무대는 칠흑이다. 은박지 조각이 바람에 펄럭였다. 가여워라, 작고 어린 것들은 부질없이 떨었다. 춤꾼은 몸에 플래시를 여러 개 달았다. 플래시 불빛은 작은 반딧불이다가, 탁탁! 어둠을 쪼아대는 부싯돌이다가, 이내 육탈한 촉루의 인광으로 희번덕였다. 꽃 같은 생명이다가, 안쓰런 불빛이다가, 구천을 떠도는 도깨비불이 됐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명멸하는 혼불들의 섬광이다.
다시 돌아온 4월, 다시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섰다. 24~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씨제이토월극장 무대에 오른 국립현대무용단의 <이미 아직>(Already Not Yet)이다. ‘이미’ 이승을 떴지만 ‘아직’ 저승에 당도하지 못했다. 그 경계적 상황을 상여에 다는 인형 꼭두를 통해 표현한다. 지난해 5월 초연에 이어 이번 무대도 ‘이미’ 1년이 지났지만 ‘아직’ 한 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남쪽 바다의 어린 넋들을 떠올리게 했다.
꼭두는 인간과 비인간, 기쁨과 슬픔, 꿈과 현실을 여러모로 상징한다. 목과 팔다리가 꺾이고 부러진 듯 춤꾼들은 마리오네트처럼 움직였다. 거미처럼 네 발로 걸었다. 목은 덜렁덜렁 육체와 따로 놀았다. 춤꾼들의 동작은 망자가 살아생전 겪은 온갖 고통과 차별을 표현한다. 부딪히고 울부짖고 등을 채찍질당했다. 춤꾼들은 죽을 힘을 다해 춤추다 마침내 쓰러졌다. 기진맥진. 온몸의 생체 에너지가 소멸한 상태, 곧 육체에서 정신이 분리되는 과정이다. 육탈한 넋은 허공에 에코로 걸렸다.
특히 마지막 장면은 인상적이다. 지난해 초연 때 손바닥만한 거울이 나왔다. 이번엔 지름이 150㎝는 됨 직한 원형 거울이 등장했다. 거울은 조명을 반사해 객석 쪽을 이리저리 비췄다. 등대다. ‘이미’ 살아 있지 않지만, ‘아직’ 지상을 떠나지 못한 한반도 남쪽 바다를 환하게 비췄다. 한편으로 그것은 그냥 거울이었다. 거울 속으로 관객을 흡수하고 춤꾼과 한 몸이 되는 것. 초연에 없었던 부분에는 양복을 입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장면도 있다. 삶과 죽음에 이어 다시 삶으로 돌아가는 순환론적인 세계관이다.
소리꾼 박민희의 전통성악은 춤판을 더욱 빛냈다. 기괴한 소리로 무대 위의 괴기적 상황에 긴장을 불러왔다. 전통성악은 요즘 현대무용에서 많이 사용된다. 실험적이고 즉흥성이 강한데다, 표현력이 탁월하기 때문이다.
안애순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안무의 <이미 아직>은 내년 하반기 프랑스 샤요국립극장 무대에 초청됐다. 유럽을 대표하는 무용 공연장인 이 극장에 우리나라 안무가의 작품이 초청된 것은 최승희(1911~1969) 이후 처음이다.
내년 프랑스 공연을 앞두고, 보완을 검토해볼 부분도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춤꾼들이 기진맥진할 때까지 춤을 추는 장면. 관객들이 자칫 지루하고 길게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아예 프랑스 공연에선 이 기진맥진 장면의 마지막을 전라(全裸)로 처리하면 어떨까? 남성 춤꾼의 경우 이미 차례로 옷을 벗어 짧은 하의만 남은 상태인데다, 정신이 육체에서 분리돼 자연으로 돌아가는 장면이라면 그렇게 하는 게 더 콘셉트에 맞아 보인다.
손준현 기자 dust@hani.co.kr, 사진 국립현대무용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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