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 권위의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한국 미술이 약진했다. 임흥순 작가는 아시아 여성노동자의 소외 문제를 다룬 95분짜리 다큐영상 <위로공단>을 출품해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세계 최고 권위 미술 비엔날레
‘국내 첫 은사자상’ 임흥순 작가
교감의 힘 돋보인 콘텐츠로 호평
한국관 전시는 첨단LED 기술로
빈약했던 공간 한계 극복 평가
이우환·박서보 등 ‘단색화’ 전시엔
해외 유명 컬렉터 발길 이어져
‘국내 첫 은사자상’ 임흥순 작가
교감의 힘 돋보인 콘텐츠로 호평
한국관 전시는 첨단LED 기술로
빈약했던 공간 한계 극복 평가
이우환·박서보 등 ‘단색화’ 전시엔
해외 유명 컬렉터 발길 이어져
한국 미술은 약하지 않았다. 세계 미술계의 변방도 더 이상 아니었다. 지난 100여년간 세계 미술계의 가장 큰 잔치이자 국가간 미술경연장으로서 지존의 권력을 누려온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가 올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일러준 사실이다.
9일 개막한 베네치아 비엔날레는 6개월여 장정을 시작하면서 본전시에 아시아 여성들의 노동 이야기를 영상으로 푼 임흥순(46) 작가에게 국내 처음 은사자상을 안겼다. 이 상은 최고 국가관과 최고 작가, 평생공로자에게 주는 황금사자상 다음의 상이지만, 35살 이하 작가들을 주로 시상해 젊은 작가들에겐 최고상과 다를 바 없다. 그뿐만 아니다. 한국관, 본전시장이 있는 카스텔로 공원과 시내 운하와 골목길 곳곳에서는 20명 이상의 한국 중견, 소장 작가들이 ‘단색화’전을 비롯해 10건 가까운 특별전시들을 차렸다. 이 중 일부는 서구 미술계의 화제를 낳았고, 세계 미술시장의 큰손들과 미술관 관계자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이렇게 베네치아에서 한국 미술이 약진한 것은 2년 전까지 어림도 없던 일이다. 현지 단색화 전시를 만든 이현숙 국제갤러리 회장은 “한국 현대미술이 암중모색 끝에 양적 질적으로 분명한 위상을 인정받았다”고 평했다. 2015년 늦봄 베네치아는 한국 미술판에서 잊을 수 없는 성취의 기억을 남긴 시공간이 됐다.
한국 미술은 이번 비엔날레에서 형식과 콘텐츠 두가지 면에서 모두 진일보했다. <위로공단>이란 95분짜리 다큐영화를 출품한 임흥순 작가의 은사자상 수상은 약자들의 이야기로 요약되는 콘텐츠의 승리다. 편견과 학대,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고투해온 아시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서정적인 터치로 훑어나간 이 작품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자본 이동과 노동 변화에 따른 현실적 불안을 예술적 언어로 써내려간 새로운 역사 기록”이란 심사위원단의 평가를 받았다.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조선소 창고 자리인 아르세날레의 구석, 좁고 누추한 상영 공간에선 관객 수십명이 들어차 전편을 감상하고 나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영화가 미술경연의 수상작이 됐고, 35살 미만의 작가들에게 주어졌던 전례를 뒤집고 46살 임 작가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가 지닌 교감의 힘을 반증한다. 임씨를 포함해 전례 없이 3명이나 본전시에 진출한 한국 작가들의 다른 작품들도 돋보였다. 1970년대 중동 건설 특수의 정치적 의미를 합창 리듬 형식을 통해 풀어낸 남화연씨나 증권 객장의 소리와 움직이는 튤립 꽃 등의 이미지를 결부시켜 투기를 미학적으로 해석한 김아영씨의 작업들도 눈길을 모았다.
문경원·전준호 작가가 출품한 카스텔로 공원의 한국국가관은 전시 공학 측면에서 한국 미술계가 확연한 진화능력을 갖췄음을 드러냈다. 미래소녀가 등장하는 첨단 엘이디 영상과 건축물이 한 몸이 되는 혁신적 기법을 활용한 전시관은 대형 첨단 광고판이 현대미술과 만나 빚어낸 새로운 요지경이었다. 문명이 사라진 미래에 홍수에서 남은 한국관 건물을 배경으로 기억이 소거된 소녀(배우 임수정)가 과거 인류문명의 흔적들을 하나하나 다시 기억하고 깨닫는 과정을 담아낸 영상은 이미지 연출의 판타지적 성격과 첨단 기술력이 관객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그러나 영상에 눌린 미약한 이야기 플롯, 맥락이 모호하고 지나치게 작위적인 배경 선정 등에서 임 작가의 수상작과 역설적으로 대조를 이룬다는 지적(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도 나왔다.
시내 곳곳에서 열린 한국 소장 작가들의 특별전도 주목할 만했다. 이우환, 박서보, 하종현 등 70~90년대 단색조 회화의 대가들의 작품들이 두루 출품된 팔라초 콘타리니의 ‘단색화’전은 유서 깊은 부호의 옛 저택을 개조한 특설전시장이 무대였다. 한국 해외전시사상 가장 고급스럽다는 평가 속에 해외 유수 컬렉터와 미술관 관계자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최근 국제적 관심을 모은 단색조 회화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단색조 회화 계열이 아닌 거장 김환기의 점화가 대거 포함돼 같은 유파로 외국 미술인들이 오해할 수 있고, 거장 이우환의 작품들이 다소 과도하게 배치된 점 등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이외에도 국내 소장 작가들이 직접 리알토 다리 근처의 전시관에서 전위적 작업들을 선보인 ‘슬리퍼스 인 베니스’나, 일본 위안부 피해자의 상처를 풀어낸 한호씨의 작업, 카포스카리 대학 전시관에서 현대 한국화를 소개한 박병춘씨의 작업 등이 입에 오르내렸다.
반면, ‘세계의 모든 미래’라는 주제를 내건 비엔날레 전체에 대해선 낙제점에 가깝다는 평가가 현지 전문가와 언론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총감독 오쿠이 엔위저는 아프리카 작가들을 본전시와 아르세날레 특별전에 대거 데려와 특유의 정치적 저항성과 역동성이 내재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하지만 89개국이나 되는 국가관 공간을 소화하느라 주제의 메시지는 산만해지고 나라별로 미술 국력을 과시하는 경쟁적 구도가 역대 어느 때보다 심해졌다.
전시의 거장 하랄트 제만이 90년대 젊은 전위작가들의 메카로 만들었던 아르세날레 조선소 전시장은 군소 국가관과 수준이 들쭉날쭉한 각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뒤섞인 잡탕 무대로 전락했다. 국가관 중에서는 조앤 조나스 같은 여성주의 거장들의 속깊은 회고전을 주최한 미국관이나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맥락을 차분히 정리한 이탈리아관 등이 돋보였다. 하지만 아르세날레 조선소의 가장 넓은 구역을 접수한 중국은 공간과 설치미술의 크기, 자국 미술의 영향력 과시에만 급급한 3류 전시를 면치 못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나의 주제로 아우르지도 못하고, 한편으로 잡다한 국가 문화 홍보관의 집합소처럼 비치는 이번 비엔날레는 사실상의 미술엑스포 혹은 컨벤션센터에 불과한 모습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김환기 작가의 푸른 점화 등 대작들이 눈길을 모은 단색화전도 호평을 받았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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